성신님과 하나님의 나라

요새 오후 예배 시간의 말씀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 아래 전해지고 있다. 요 근래에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신님과 하나님 나라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증거되고 있다.

 

성신님으로 인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을 주(主)라고 시인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성경을 두 손에 쥐고서도, 또 오리라 한 그 자손이 오시어 그들 눈 앞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오직 성신께서 큰 능력으로 중생시키시셔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복음이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로 퍼져가고 있으며 곳곳에서 믿고 회개하는 자들이 나오고 있다.

 

성신님은 크신 능력으로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해 나가신다. 할례로 대표되는 문제로 인해 유대인들과 비유대인 간에는 막힌 담이 있었다.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성신이 임하신 것을 보고 곧바로 세례를 주어 교회의 일원임을 표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분이 없다고 확정했다. 성신께서는 친히 그것을 확증해 주셨다. 머지 않아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을 비롯한 이방 지역의 교회들이 힘껏 헌금을 하여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이처럼 성신께서는 능력으로 막힘 담을 허시고 교회를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셨다. 이런 위대한 나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래를 찾을 수 없다.

 

그토록 민주주의가 앞섰다는 미국에서도 노예제도가 없어진지는 200년도 되질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2000년 전에 벌써 철폐했다. 세상이 노예제도를 없앤 데에는 교회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 교회는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한 혁명이나 사회운동을 벌이지 않았다. 오직 성신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종이나 자유자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시고 사랑으로 묶으셨다. 빌레몬서에 이것이 잘 나타나고 있다. 제도를 바꾸어 보지만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는 이 세상과는 달리 성신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바꾸심으로, 제도도 어찌하지 못하는 위대한 사실을 교회 가운데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1-3)

 

새로운 생명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을 만나면, 새 생명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극기 또는 수련을 통해서 얻어다고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자연스러움, 조화,
그런 것을 보게 된다.
아무런 부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점점 커간다는 그런 생명 특유의 증상,
그것을 감지한다.

내겐 그 증시가 있는가.
내겐 그 생명의 약동이 있는가…

전통적인 신앙?

베니 힌(Benny Hinn)이라는 사람은 상당히 신비주의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책 <안녕하세요 성령님>에 대한 어떤 독자의 평에서 그가 “전통적인 신앙”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읽고 당장에 든 생각은 ‘전통적 신앙’에 대한 오해가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자기가 평소에 들어본 것이 아니면 “새로운 것”, 자기가 평소에 교회에서 많이 들은 얘기라면 “전통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평소에 많이 들은 것 중에도 비전통적인 것들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예를 많이 들 수 있는데, 하나 들자면 `구약은 율법 시대였고 신약은 은혜 시대다, 구약은 성부 시대였고 신약은 성령 시대다’는 식의 세대주의 해석; 또 들자면 `하나님은 구원을 마련하실 뿐이고 그것을 붙잡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는 알미니안주의; 너무도 많은 오해와 불순들이 “정통 기독교”이라는 이름 아래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앞서 언급한 베니 힌은 삼신론(三神論)적 주장을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러한 오류들은 결코 주류(主流)로서 역사를 관통하는 신앙의 내용이 아니다.

 

그럼 ‘과연 전통적인 것이 다 옳은 것이냐’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당연히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이다. 결코 전통이라는 것을 숭배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허나,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것은 그것이 “계시의 종교”라는 사실이고,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것은 성경이지 21세기 지금 어떤 개인이 또는 단체가 새로이 무슨 계시를 받을 일이 없을 뿐더러 —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의 정점으로서 그의 사도들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충분한 내용이 이미 전해졌고, 그렇게 전해진 성경을 가지고 지금도 주께서는 말씀하시므로 — 분명히 역사 가운데 흐르는 주류의 신앙을 논할 수 있다. 소위 기독교 신앙은 연역적이지 귀납적 접근을 요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으며, 과연 그러하다는 것을 역사 가운데 실증해 왔고 앞으로도 실증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그것 아닌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잘못 된 것과의 논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증이다. 전통적인 교리를 붙잡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천상천하의 대권을 가지시고 지금 통치하시는 ‘레그눔 그라티아애’(regnum gratiae)의 실증이다.

 

Calling

피조된 것 중에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우며 소중한 것은 교회이다.

이 세상에서 진행되는 일 중에 가장 거룩하고 아름답고 소중하며 희망적인 것은

참 교회가 뚜렷이 서 나가는 것이다.

그 분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준엄한 부르심을 느낀다.

부르신 보람을 만들어 주시고 이루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명실이 상부한 신앙

(사사기 소고 1, 제 3-5강 을 읽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체득, 체현 하여야 하겠다”

유명무실한 신앙을 반성함

우리는 “은혜 받았다”는 말을 자주 쓰는데, 그 진정한 의미를 살려서 쓰고 있는가? 예를 들어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우로지택(雨露之澤)도 은혜다. 그러나 은혜 중엔 하나님의 백성들만 특별히 누리는 은혜, 구속의 은혜가 있다. 성경을 읽을 때도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성경을 읽으면 받을 수 있는 감동과 지식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일반 은혜이다. 이러한 말씀의 영향을 가지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은 아니다. 성경을 성신께서 들어 쓰시사 사람이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활동하게 하시고 장성케 하시는 역사가 있을 때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용한 것이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에게 성경을 주실 때 의도하신 특별한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았다”는 말을 할 때, 성경을 읽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든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지칭함인가, 아니면 죄의 권세에서 자유케하시고 그리스도를 향해 걷게 하시는 구속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얘기인가? 말로는 “은혜”를 외치기 쉽지만,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은혜의 실증을 갖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것들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분별하지 못한 채 자연인이 쉽게 가질 수 있는 종교관과 뒤섞인 자태를 취하고 있다면 그것은 혼잡 가운데 있는 것이며, 거룩하지 못한 것이며, 교회를 더럽히는 것이 된다. 여기서 타락이 시작된다는 것을 사사기는 보여주고 있다. 성경의 언어들로 꾸며진 기독교 문화가 융성할지 몰라도 그것은 참 종교, 참 신앙의 실증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이 세상’(ο κοσμοσ ολοσ)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 종교 또한 포함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닌 능력

하나님 나라를 가장 뚜렷이 세상에 증시하는 기관인 교회는 그 처한 역사 시기에 따라 세상의 공격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해 기독교를 변증(apologetics)하는 움직임이 있어 왔는데, 이것이 승리를 거두는 것을 보는 것은 드물다. 물론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은 오직 성신님의 역사로만 깨닫게 되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해는 된다 (고전 2:14). 그렇다면 교회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한단 말인가?

“와서 보라” (요 1:39,46; 4:29)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하셨다 (고전 4:20). 사람의 허술한 철학과 무지를 타파하는 것은 실증에 있다. 결국 세상엔 구원의 능력이 없지만, 그리스도에겐 구원의 능이 있으며, 그리스도와 그 분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증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다. 교회가 거룩하게 구별되어 이 세상에서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는 것의 중요성이 여기 있다. 세상과 섞여서 하나님 나라의 광망을 드러낼 도리는 없다. 교회는 무엇이 신국적(神國的)인지 무엇이 비신국적인지 늘 분별해야 하겠다.

현 세대의 특징

20세기를 지나면서 나타난 교회에 대한 공격의 특이한 점은 그것이 ‘정통’이라는 이름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복음주의”라는 이름만 내걸어 놓고 열린 자세를 취한다면서 (이러한 것들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닌데), 무엇이 신국적(神國的)이고 비신국적인지 냉철한 분별 없이, 심지어는 반신국적인 것임에도 그것을 취하여 선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참 기독교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슷하나 아니다’라는, 다시 말해 사이비(似以非)인 것이다.

사이비적인 것을 배제하려면 참된 것을 확호하게 쥐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족할 때가 많다. 당장 “예배”라는 문제라도 놓고 봤을 때 무엇이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것인지 모호할 때가 있다. 찬송과 말씀, 기도 등을 합친 것이 예배인가?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요 4:23)고 했는데,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바 찬송, 말씀, 기도 등과 구별짓는 예배의 본질적 내용을 간취하지 못한채 ‘예배 갱신, 예배 회복’ 등 수 많은 구호를 외쳐 보아도 유명무실할 뿐이고 그만큼 교회는 가난해지는 것이다.

현 세대의 공격의 또 다른 면모는 매우 치밀하고 세세하게 공격해 온다는 것이다. 예컨데 인간의 이성을 최고의 자리에 모셔놓고 성경을 분석하겠다는 자유주의 신학이 그런 유이다. “동정녀 탄생은 신화”라는 주장을 세세한 이론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그런 것에 대해 “그것은 정통 기독교가 아니다”는 주장을 하는 소위 ‘보수적 교단’들이 어떻게 결국 자유주의를 수용하였는지 우리는 보았고, 또 보고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나라는 말과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통입네”라는 이름만 있을 뿐 그 실증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왜’ 그리스도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해야 했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의 이론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이다. 공격이 치밀하게 오는 만큼 우리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쳐 주신 것들에 대해 어리숙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깨닫겠다는 자세가 요구된다.

명실이 상부한 위치로

예배면 예배, 찬송이면 찬송, 기도면 기도 —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방도들로 주신 것들에 대해 주께서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바로 알고,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대하여야 할 것이며 또한 그것을 통해 주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한 체득이 있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대상 중 가장 고귀한 교회에 대해서도 그 본질과 생명을 분명하게 알고, 말로만 ‘그리스도의 몸’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실증이 있어야 하겠다. ‘예수는 왕’이라 외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분의 통치의 체현이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증시하는 위치에 있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