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이 온다 — Mac OS X “Leopard”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 약 25시간 뒤면 맥(Mac)의 신판 운영체제 “Leopard“(“을레퍼드~”)가 출시됩니다. 아마존(Amazon.com)에서 약 $20 싸게 팔길레 미리 구입을 했습니다. 배송은 내일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가장 기대 되는 기능 중 하나는 “스페이스“(space)인데, 복수의 작업공간(desktop)을 사용할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리눅스(Linux)에서는 이미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기능인데, 드디어 맥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기쁩니다. 제가 컴퓨터로 작업을 할 때 문서 작성과 웹 검색을 자주 함께 하게 되는데, 이 두 가지 작업 만 해도 복수의 창을 열어야 할 때가 많고 거기에 어떤 작업(PDF 문서 읽기등)을 더 추가적으로 하려면 금방 작업공간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복수의 작업공간을 만들고 관련있는 창 끼리 묶어 주면 더 편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외에도 좋은 기능들을 선보이고 있는데, 그것들 기존에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물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에서는 여전히 볼 수 없지요) 매킨토시의 특징을 잘 살려 신속하고 깔끔하며 안정적으로 돌아가도록 했다는 것이 매력입니다. 자세한 평가글이 있네요; 윈도우즈 비스타(Vista)와 비교한 내용을 보면 “표범”이 비스타 보다 빠르고 보안이 좋으며 기존에 설치되었던 프로그램들과의 호환성 문제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을 장점으로 들고 있습니다. 영어로 제작된 동영상 안내가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우리의 빈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회학자들의 경우 교회의 등장을 어떤 사회적인 활동의 결과물처럼 이해하려고 시도하겠지만, 우리에게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설립하셔서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형태로 존재하여 왔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새로운 형태, 더 발전된 형태의 교회가 (소위 신약의 교회라고 부르는데) ‘오순절 성령 강림’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수립되었습니다.

특히 그 역사의 순간이 성경의 사도행전 2장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과연 교회를 단순한 사회적인 단체, 공동체, 친목회, 신우회와 구별시키는 독특한 성격이 무엇이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배, 선교, 사회 봉사, 친목, 교육 등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일들은 꼭 교회라는 특수한 이름을 안 붙인 단체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고 때로는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돌려 말하자면, 선교 단체를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 회사 내에서 기독교인들이 모여 신우회 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리면 그 신우회를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러한 것들에 대해 ‘거기엔 성례전 또는 권징이 시행 되지 않으니 교회라고 할 수 없다’고 답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모여 목사를 세우고 여러가지 형식을 갖추고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면 (일반 사회에서야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겠지만) 우리가 그것을 교회라고 할 수 있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교회의 본질과 생명에 대해 우리의 각성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우리의 빈곤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부패가 들어오기 쉽고 또 그러다 보면 타락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빈곤

기독교의 진수는 죽어서 천당가는 데에 있지 않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내세에 국한 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성경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과연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해 보면 대답이 모호하다는 것이 우리의 빈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공동체다 등 여려 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얼마나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가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그 의식이 빈약하다면 그만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각성이 빈약하다는 뜻일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란 단어가 죽어서 가는 곳이란 한정된 의미로 대개 사용 되는 것이 아닐까요?)

성경의 기록을 보면 (특히 누가복은 24장과 이어지는 사도행전 1장)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까지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당신이 누구인가, 왜 부활하여야 하는가를 설명하시고,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현재 다스리고 계신다고 증거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그 나라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어떻게 그 왕권을 행사하시는가? 그 나라의 법과 도리는 무엇이며, 무엇을 천명하고 또 추구하고 나가는가?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이는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거짓말도 분수가 있지

소위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 중엔 성경에 있는 기록 중엔 사실이 아닌 것이 있으므로 그런 것을 잘 구분하여 참된 것 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사실 아닌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신격화’라고 합니다. 만일 이 주장이 맞다면 차라리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왜냐면 거짓말에도 분수가 있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제 3자로서 다른 사람이 저지를 잘못에 대해 그것을 지적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자기”가 용서할 수는 없는 것이고, 또는 “자기”의 이름으로 도덕률을 세울 수는 없는 것인데,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남의 잘못을 자신이 용서할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며, 또 자신의 권위로 도덕법을 제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예수님의 유명한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 표현 중 일부. 마태복음 5장에서 발췌)

나무도 나쁘고 열매도 나쁘다고 하지, 열매는 나쁜데 나무는 좋다고 하지 말라

만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 처럼 위와 같은 예수님의 신격화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가장 악질적인 거짓말 중 하나를 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한 민족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게 말하는 것 조차 악한 거짓말인데 말입니다. 악한 거짓말을 기록하고 그러한 거짓 위에 종교를 창시하려는 사람들이 백번 사랑하라던지 착하게 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귀담아 들을 것이 못됩니다. 왜냐면 거짓의 열매를 맺는 나무는 나쁜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십계명에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적는다 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성경은 전혀 읽을 것이 못 된다고 말했으면 말했지, 그 중 일부는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의 입장은, 신이 아닌 사람을 신격화하는 거짓은 서로 사랑하라든지 진리 안에서 기뻐하라는 순결한 언어와 도저히 함께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적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생활이 결국 실증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그것을 확신하고, 그 진리의 능력을 맛보고, 그것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나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해도 싫은 세상인데

타인이 내게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도 싫어하는 세상인데, 누군가 난데 없이 나타나

“네가 살면서 지은 죄를 용서해주마”

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겠습니까? 내가 잘못한 일에 그 피해를 당한 사람이 나를 용서해 준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제 3자가 뭔데 내가 죄 있다고 선고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걸 용서까지 해준다 만다 하겠냐 말입니다.

이것은 2000년 전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중풍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위의 말씀을 하시고

“나에게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10). 그리고 자신의 말이 공허히 하는 말이 아니라는 실증으로 그 중풍 병자에게 명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다른 사람의 권위를 빌어서도 아니고 친히 당신의 권위를 의지하여 명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이스라엘 민중은 분노하였습니다. 세상에 사람에게 죄가 있고 없고를 선고할 심판자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고 믿는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이라 할 때는 뉴에이지 운동 또는 범신론에서 얘기하는 식으로 “모든 것이 신이다” 하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의 잘 잘못에 대해 심판하고 그것을 용서할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뜻이 거기에는 분명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