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진중권 씨가 평화방송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해서 말하길,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영어를 제일 잘 하는 나라에 속하고 일본에 가면 영어가 잘 안통하지만, 어느 나라가 더 경쟁력이 있는지 비교해 보라고 했다는군요.

옳은 말입니다. 언어는 사고를 담는 틀입니다. 그릇이라 할 수 있겠지요. 영어든 국어든 언어의 구사가 더욱 능숙하면 할 수록 좋습니다. (제가 늘 한탄하는 것이 한국에는 유사어 사전 등 좋은 thesaurus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국어 사용 수준을 가늠하게 해주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릇에 담을 내용이 없으면 소용 없는 일 아닙니까. 한국에서 금은 외국에 나가도 금입니다. “Gold!”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더 좋지만, 손에 든 것이, 머리에 든 것이 없으면 영어를 아무리 잘 해도 소용 없는 것입니다.

영어 외에 다른 과목도, 예를 들어 수학을 영어로 가르치겠다는 생각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가 잘 못 알아 듣는 학생들이 나타날 바에야 국어로 똑똑히 가르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전자렌지에 반숙 계란 또는 물 가열시 위험

전자렌지에 물을 넣고 지나치게 가열 시키면 물이 끓는 점 이상으로 가열되어 작은 충격에 폭발적으로 기화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비슷한 이유로 반숙된 계란 전체를 반으로 자르지 않고 통 채로 전자렌지에서 가열 시키면 노른자 내부에 강한 압력이 생성되어 작은 충격에 폭발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껍질을 까고 안 까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일엔 꼭 실험을 해보려는 사람들이 있지요. 아래에 몇 가지 동영상을 찾아 봤습니다. 집에서, 특히 어린이들은, 결코 따라하지 마세요.

교회는 사회 선도 단체가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삭막한 현대 사회 속에서도 공중 도덕과 법을 잘 지키고 이웃을 돌아보며 나눔을 실천하고 근실하게 노동하며 살아가는 것은 기독교인/비기독교인 할 것 없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할 일입니다. 그런 것을 가르치기 위해 종교를 들먹일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도덕적 삶을 가르치는 것을 공교육에서 발견합니다. 건전한 사회인을 길러내기 위해 종교 단체를 조직할 필요는 없습니다. 종교와 상관 없이 사회 봉사 단체 또는 사회 정의 실현 단체 등을 조직할 수 있고 또 그런 조직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존재 의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단체든 그 단체가 성립 될 때는 고유의 목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빈민 구제 단체가 부족하거나 사회 정의를 위한 시민 단체 또는 자선 사업체가 부족해서 교회를 세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일들은 중요한 일들이고 시민이라면 관심을 가져야 할 일들임은 분명합니다만, 그것이 교회를 세운 목적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반 사회에서는 그런 구제 사업 또는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교회가 앞장 서면 참 잘하는 일이라고 칭찬을 하고 곧추세웁니다.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건 차라리 문제가 아닌 것은 어떤 단체의 비회원이 그 단체의 목적을 알아야 할 당위는 없기 때문이고, 문제는 교회 또는 교인이 교회가 왜 존재하고 자신의 의무와 권리가 무엇인지를 잘 모를 때입니다.

교회가 자신의 본질을 망각하면 세상이 ‘잘 한다, 잘 한다’ 하는 인정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게 되고 또 그러한 일에 주력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타락하게 되고 부패하게 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일체성, 그 신비한 연합(unio mystica)을 나타낼 길은 요원해집니다.

율법에 담긴 복음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위의 말씀에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속죄의 법과,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그 속죄 제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다는 복음을 봅니다. 사람이 무엇을 준비해서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사람이 믿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키면 영생을 주신다는 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법이지만,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기” 때문에 (이사야 64:6)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갈라디아서 2:6)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어떠하시다는 것을 가르치심과 동시에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인간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려고 하시는지 또한 친히 율법 가운데 가르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키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로마서 7:10) 그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아님을 율법 가운데 친히 가르치신 것입니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속을 믿는 것이 구원의 도리임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번 주일 설교 시간에 강설된 내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