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참된 영광을 신유, 방언, 환상으로 뒤바꿈

사도 바울은 다메섹 근처에서 예수님을 뵙고 사흘간 식음을 전폐하고 그가 그 때 까지 고수하고 있던 전통적인 메시아관과 메시아 나라의 생각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분명히 나사렛 예수 그 분이 메시아시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 분이 왕으로 좌정하신 레그눔 그라티아에(Regnum Gratiae)의 자태를 모두 다 깨우친 것은 아니었겠지요. 하지만 이 때 부터 평생 지속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배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께서 다스리시는 바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을 향해 전진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받은 계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이 성경으로 완성 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신앙의 도리가 필요 충분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 올릴 때, 우리는 그 사람을 가장 마지막으로 본 때의 모습을 꼭 떠올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모습이 주로 떠오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 바울도 성경을 기록하는 가운데 자신이 예수님을 뵈었을 때 그 분의 생김새가 어땠는지는 하나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메시아의 나라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과 그 사랑과 은혜와 엄위가 어떠한지, 또한 지금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을 설명하였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큰 선지자라고 칭함을 받는 모세도, 영적인 황홀함 등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법과 도리를 찬찬히 그리고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를 세우는 건국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아 같은 대 선지자들도 민중과 함께하고 궁정에 가까이 있으면서 역사를 설명하고 국가 경영의 정도를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얘기로 민중을 선동하지 않습니다. 가장 정상적이고 건실한 생활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적을 보고 좇아오는 민중의 모습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뵌 사도 바울도 자신의 지병이 낫기를 세 번이나 간구했지만 주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사사기 초반에 보면 이스라엘에 철공이 없어 블레셋에게 군사적으로 열세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구원해내실 때가 있었지만, 그러한 기적에만 의존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리가 없습니다 —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 문화명령을 우리에게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법을 잘 연구해서 여러가지 약초도 발견하고 기술도 쌓고 해서 건실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지, 주께서 삼라만상을 지으신 원리에 대해서는 공부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밤낮 앉아서 병 낫기를 부르짓는 것을 기뻐하실리 없는 것입니다.

가끔 보변 신유의 은사다 뭐다 해서 그게 무슨 대단한 능력인 것 같이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국경 없는 의사회” 같은 조직이 전 세계적으로 펼치는 병 고치는 활동에 비하자면 너무도 미약한 능력들입니다. 과학자들이 백신을 개발해서 병을 예방하고 퇴치하는 것에 비하자면 너무도 시시한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후자와 같은 건실한 실력을 길러내는 것을 늘 목표로 하지, 기적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또 무슨 계시를 받네 마네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계시는 무당이 점치는 것 같은 얘기만 합니다; 누가 직장을 생긴다 만다, 이사를 간다 만다, 또는 너는 기도를 많이 한다 안 한다; 또는 올해 경제는 어떻다는 등… 물론 성경에서 그런 계시를 받아 전한 사람들이 있지만, 요셉이라던지 다니엘 같은 사람만 보더라도 그러한 계시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 계시에 걸맞는 국가 경영의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럴 만한 역사적 안목과 실력을 갖추었는지는 살펴보지 않고, 그냥 신비한 얘기들만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보통의 안 믿는 사람들이 베푸는 치료의 사역과 경영의 능력 조차 보이지 못하는 시시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신유네 환상이네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무슨 영광인 것 처럼 얘기하니, 하나님 나라의 참된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는 커녕 세상 사람이 봐도 우습고 업신 여기는 상태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의 참된 영광을 신유, 방언, 환상 등 신비주의로 뒤 바꿔 버렸기 때문입니다.

금식은 기도를 돕기 위한 것

금식에 대해서 생각할거리를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의 방도로 말씀, 예배, 찬송, 기도, 헌상, 성찬과 세례를 들 수 있지만, 금식은 그 자체로 은혜의 방도로 보지 아니합니다.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금식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금식 자체가 무엇을 이루지 못합니다. 물론 그것은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무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의지하는 것이고, 나를 부인하는 하는 것이잖습니까. 우리의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께 인정 받을 근거가 되지 못하며, 우리의 의란 다 더럽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하지 말라고 했다

(오래전에 쓴 글인데 이제서야 올립니다.)

유학을 처음 왔을 때, 일 년 동안 한 공부의 양에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왜 이처럼 능률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얻은 결론은 미국에서의 생활이 한국에서 보다 단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새 다시 능률이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문제는 주의를 분산시키는 인터넷 환경에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이르고 있습니다. 크리스틴 로센(Christine Rosen)의 보고에 의하면 휴렛-패커드와 런던 대학 심리학과의 공동 연구 결과 ‘이메일과 전화로 업무 방해에 시달리는 사람의 IQ가 마리화나를 피우는 사람 보다 두 배 더 떨어진다’고 합니다. 두 마리 토끼 좇다가 다 놓친다는 얘기가 여러모로 참인 셈입니다.

또 한 가지 당연하면서도 의미 있는 사실을 로센의 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카이저(Kaiser Family Foundation)의 2006년 보고에 의하면 “자극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이 이러한 동시 다량 업무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초 신경 자극을 추구하는 인간의 죄성과 그것을 제공하는 현대 문화, 그리고 인터넷 기술이 합해져서 사람의 능률과 사고력을 떨어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Multitasking messes with the brain in several ways. At the most basic level, the mental balancing acts that it requires—the constant switching and pivoting—energize regions of the brain that specialize in visual processing and physical coordination and simultaneously appear to shortchange some of the higher areas related to memory and learning. We concentrate on the act of concentration at the expense of whatever it is that we’re supposed to be concentrating on.

— Walter Kirn, “The Autumn of Multitasking

Institutes 1.5.6–9

(I wrote this quite a time ago; forgot to put it online and now I do it.)

And here again we ought to observe that we are called to a knowledge of God: not that knowledge which, content with empty speculation, merely flits in the brain, but that which will be sound and fruitful if we duly perceive it, and if it takes root in the heart. — Institutes, 1.5.9

That we study and learn just because we are curious or want to know, is not to be recommended; even though the subject we study is about the historic faith and the truth since the objective is simply to fulfill our lust for knowledge. Likewise, the good deeds and various honorable works that we could do, if we do it just because it is a good thing to do, then we are simply seeking our lust for ethical or religious ideals. These are what Old Man does.

Such temptation is all over us; on personal level and corporate level. A simple example can be drawn from instances where futile arguments are carried out on internet. Because I find an arguable statement or a posting on the internet, because it would be good to correct that, and because it seems such action is within my reach and strength (after all, it’s just 1-click away), it is very easy for me to go ahead and engage in the discussion. This is precisely what the Old Man, the Natural Man, does; seeking good because it is good! But whatever does not proceed from faith is sin (Rom 14:23).

기독교강요 1.7절

(1년 완독 계획표가 여기 있습니다.)

1.6절에서 내린 결론—하나님의 계시의 기록, 곧 성경을 떠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음—에 의거하여, 하나님께 대한 바른 깨달음의 최종 권위가 성경에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무리들이 교회를 이루고 있고, 교회의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지, 역으로 교회가 성경에 권위를 부여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 역시 성경의 권위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에베소서 2:20)

위의 말씀에서 보듯이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전한 말씀의 터 위에 세움을 얻었다 했습니다. 누구든지 교회의 부분이 되려면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전해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스스로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최종의 권위로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해 주지 않으면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무엇이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대해 칼빈은 그것은 마치 이렇게 묻는 것과 다름 없다고 말합니다: “빛과 어둠을 구별하는 법을 누가 가르쳐 줍니까? 흰 색과 검은 색을, 단 맛과 쓴 맛을 구별하는 법을 어떻게 배우지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은 교회가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