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vin’s Commentary on 1 Peter 4:3

Quote

But here a question arises, that Peter seems to have done wrong to many, in making all men guilty of lasciviousness, dissipation, lusts, drunkenness, and revellings; for it is certain that all were not involved in these vices; nay, we know that some among the Gentiles lived honourably and without a spot of infamy. To this I reply, that Peter does not so ascribe these vices to the Gentiles, as though he charged every individual with all these, but that we are by nature inclined to all these evils, and not only so, but that we are so much under the power of depravity, that these fruits which he mentions necessarily proceed from it as from an evil root. There is indeed no one who has not within him the seed of all vices, but all do not germinate and grow up in every individual. Yet the contagion is so spread and diffused through the whole human race, that the whole community appears infected with innumerable evils, and that no member is free or pure from the common corruption.
— John Calvin on 1 Peter 4:3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1서 4장 1-2절 일부)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육체 가운데 죄 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잘못된 가르침들을 경계했다.

그 때와는 조금 다르지만, 오늘날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의미 보다는 그 분의 삶이 보여주는 영적, 정신적, 혹은 윤리적인 교훈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사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사신 것과 그 분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의 관계를 잊어서는 아니 되겠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이심을 시인하지 않고 그 분께서 사랑과 나눔의 본을 보여 주신 것으로써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오늘날 어떤 사람들의 움직임을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도의 말 처럼 그것은 참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적그리스도의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를 쏟으신 것은 그 안에서 우리도 함께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다. (로마서 6장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에 참예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식으로 살 수 없다. 오직 그의 성신으로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Yet Christ is not simply to be viewed as our example, when we speak of the mortificaion of the flesh; but it is by his Spirit that we are really made conformable to his death, so that it becomes effectual to the crucifying of our flesh. [그러나 우리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것을 이야기 할 때 그리스도를 단순히 우리의 모범으로써 보아서는 안 된다; 오직 그 분의 성신으로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 정말로 참예하게 되며, 그리하여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이 유효하게 된다.]
— John Calvin, Commentary on 1 Peter 4:1 [칼빈, 베드로전서 4:1 주석]

성경의 도덕적 교훈은 세상의 교훈과 어떻게 다른가

아래는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삶” (김홍전 著, 성약출판사) 제 10강 가운데 일부이다. 김홍전 박사가 1968년 2월 4일 주일 아침 성경 공부 시간에 전달한 내용이다. 이러한 깊은 통찰력은 참으로 하나님의 성신께서 주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거룩한 교회에 주신 역사적인 신앙과 신학을 우리 말로 공부할 수 있게 조국 교회에 이런 교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기초적인 내용인데, 어리석은 우리는 자칫 잊어버리고 타락하기 쉬우니, 교회는 꼭 숙지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결과 ‘이것이 하나님의 선이고 의다’ 한다면, 거기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그것은 한 개의 철학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것을 따른다면 철학자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바 선하고 의롭다는 것을 그대로 따라 나아가는 것과 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철학자가 ‘나는 이것을 선으로 규정하고 이것을 신이라고 생각한다’ 하는 반면에, 기독교인은 ‘신이란 이러이러한 분으로서 나는 선이나 의를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한다면, 거기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붙기는 했을지라도 사람들이 나름대로 생각하여 자기가 이리저리 그렇거니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절대로 참된 하나님의 선과 의의 자태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것은 철학입니다. 거기에 종교적인 요소를 가미한다면 결국 종교적인 선일 뿐입니다.

어떤 도덕가가 말한 교훈과 비슷한 이야기를 성경도 말했다고 이야기한다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선미(善美)의 특성을 드러내게 되느냐 하면 그것은 아주 생각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교사들이 하나님의 선미의 특성을 드러낸다고 하면서 성경을 인용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보면 성경을 모르는 세상의 도덕군자나 철인(哲人)들이 한 말과 비교할 때 더 나을 것이 별로 없는 말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언제든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는 말씀은 여러분이 아주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은 종교적인 친구들끼리 모여서 음식을 내놓고 식사 기도를 할 때 붙이는 정도의 말씀이 아닙니다. [...] 먹고 기운을 내서 나중에 좀 더 종교적으로 봉사를 함으로써 먹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먹고 기운 내서 무엇을 하는 것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먹고 마시는 항다반의 생존 방식들은 선하고 악한 문제가 아닙니다. 먹는 것 자체야 선하다든지 악하다든지 할 것이 없습니다. [...] 사람의 생존에 기본으로 필요한 생리적인 작용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것은 선하다든지 악하다든지 하는 도덕적인 문제로 평가할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 그러면 먹고 마시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생존을 위해 그러한 기본적인 방식이 필요한 사람으로서 너는 숨쉬고 식사하고 잠을 자는 항다반의 생활 방도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목적 의식하에서 취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일에서 너는 선하고 어떤 일에서는 악하다 하지 않고 그처럼 가장 기본적인 자기의 생존 방도조차 어떤 도덕적인 평가를 할 위치에 놓아둔다면, 그 여타의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확실한 도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먹는 것조차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 할 것 같으면 먹고 기운을 내서 쓰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먹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 요컨대 우리의 도덕적인 기저 혹은 자리는 이 세상 사람의 도덕적인 위치와 같은 차원이나 같은 터 위에 있지 않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령 ‘부지런해라, 게으르지 말아라, 무엇을 열심히 해라’ 하는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도 항상 별다른 차원 위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부지런해야 하듯 너희도 부지런해라 하는 말도 아니고 이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식의 게으름을 갖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여러 가지 것들이 다 독특한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자리를 달리하고 베푸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 평가의 자리 혹은 행동할 수 있는 기초는 세상이 생각하는 그것과는 전연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도덕 판단의 자리는 세상의 도덕적 교훈과는 전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도덕 교훈을 이야기할 때 이 세상의 도덕과 비교해서 좀 더 낫다든지 못하다든지 하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정당한 것입니다. 세상의 도덕은 소극적인데 이것은 적극적이다 하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의미 없는 이야기입니다. 소극적이라든지 적극적이라든지 하는 것과 상관없는 딴 세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항상 이런 점을 우리가 먼저 명심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많은 실천 사항의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은 그것을 실천할 사람의 자격이나 능력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체를 세상 사람과 다른 위치에 놓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불신자보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으라’ 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자에게 해당되는 도덕 교훈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신자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정열을 쏟아서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내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런 점을 특별히 생각하면서 좀 더 공부해 나가십시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주께서 저희를 새로운 생명으로 지으시사 새사람으로서 새로운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무엇이든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또 길을 가게 하셨사옵나이다. 저희에게 주신 모든 거룩한 교훈들이 새 세계의 규칙이지 결코 묵은 옛 세상에 있는 규범이 아닌 것을 저희 교우들이 잘 깨닫고 터득해서, 여러 가지 현실적인 듯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냥 보통의 인간적인 능력으로 그것을 시행하라는 것이 아닌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여 주시고, 그리하여 주께서 저희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도덕적인 위치에서 늘 떠나지 않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기독교인의 전형들

열두 사도라는 이름은 우리가 존중히 여기고 얼른 높이는 것이지만, 개별적으로 가만히 따지고 보면 아까 이야기한 것과 같이 우리가 그 이름을 몇 사람이나 기억하고 있는가 의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인데, 이사람들은 과연 그렇게 무의미하고 희미한, 즉 무명무색한 사람들인가? 그렇게 무명무색한 사람들을 주께서 데리고 무엇을 하시려고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이름이 없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참으로 기독교인의 한 전형적(典型的)인 예를 내놓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전형의 예라는 것은 뭐냐 하면,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해서 세상의 명예나 찬양이나 보상과 같은 것을 바라지 않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신실하게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고 그리고 자기에게 주신 바 임무를 그것이 작고 크고 간에 상관할 것 없이 충성스럽게 하려는 그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시시하면, 그것 시시하다고 집어 내던지고 안 하려고 합니다. 같은 세월을 보내면서, 같은 정력을 쓰면서 하는 일이 보람 있고, 해 놓으면 효과도 번듯하고 사람들도 괄목할 만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옳지, 뭐 시시하게 미미한 이것을 하랴 하는 것입니다. 신자라도 가령 예배당에 가서 예배당의 문 앞에 섰다가 안내하면서 새로 온 사람들을 인도해 준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신을 벗고 들어가는 데서 신장을 정리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은 뭐 별로 중요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장로라도 되어 상좌에 떡 앉았다 일어나서 가끔 이야기도 한 마디씩 하고, 남들이 다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집에 있든지 혹은 밖에 나가든지 남들이 다 “장로님, 장로님” 또 “집사님, 집사님” 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무엇이든 벼슬이 하나 붙기를 바라는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바른 신자의 정신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이 열두 제자 대부분이 무명무색한 사람이며 따라서 역사에 오르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원체 대표자가 돼서, 역사에 나타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야고보 같은 사람은 예수님의 가장 측근에 있으면서 예수님이 늘 데리고 다닌 세 사람 중의 하나지만 뭐 별로 특별한 업적이 없습니다. 있다면 마지막에 다른 사도들보다 일찍 헤롯의 칼에 죽은 그것입니다(행12:2). 열두 사도 가운데 최초로 순교를 한 사람입니다. 요한은 물론 고통도 많이 받았고,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또 계시록을 쓴 것 때문에 우리에게 친숙한 사람입니다. 물론 굉장한 일을 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 업적이 남아 우리가 지금 아는 것입니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일, 전도하는 일을 열심으로 하다가 죽었겠지만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 후대의 역사에도 참으로 많지 않습니까? 어디 알 수 없는 데 가서 전도하다가 수한이 다해서 죽든지 순교를 하든지 그런 일이야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둔 사람들입니다.

— 김홍전,

중생자의 생활

하나님의 자녀가 장성하는 자태는 말씀이 들어가면 성신님이 그 말씀을 쓰셔서 그에게 힘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각오와 각성이 있게 하셔서 그가 ‘아,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나는 이렇게 하려 해도 그 일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고,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네 힘으로도 못하고 능력으로도 못하고 오직 성신으로만 하는 것이다”(슥 4:6) 하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신을 좇아 행하라”(갈 5:16). 성신님을 의지하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대로 내가 “아니요” 하고 반대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령하고 거룩한 자태와 하나님 자식다운 자태를 생활 가운데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종교나 혹은 세상의 도덕이 하라고 하는 것을 그대로 준행해서 이루어 놓은 자태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도덕에서는 “너는 열심을 내라, 부지런해라, 마음을 고정해라,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교훈할 때, 사람은 그 교훈대로 수양하고 노력해서 상당히 그런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차츰차츰 그런 덕이 많이 쌓여지면 도덕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도리도 그런 식으로 하나씩 쌓아올릴 수 있느냐 할 때, 쌓아올려서 만들어 보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중생의 도리를 잘못 깨닫고 성경이 가르치는 여러 교훈을 잘 지키라, 죄를 함부로 짓지 말라, 부지런히 하라, 열심으로 교회를 섬기라, 남에게 신실하라, 친절하라, 마음을 항상 고정하라, 이런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면 ‘아, 그래야겠다’ 하고 하나하나를 노력해서 해 보려고 하기는 합니다. 마치 세상 사람이 어떤 도덕적 교훈을 노력하여 실천해 보려는 것과 같이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다운 모양을, 그런 인격적인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으나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사람의 자연스러운 장성의 자태가 아님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사람의 자연스러운 장성의 자태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느껴야 하는 것이고, 하라고 말씀하시는 일들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부지런하라” 해서 내가 가진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을 가지고 부지런히 산다든지, “정직하라” 해서 내가 가진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으로 정직히 행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경지, 그 순결, 그 부지런을 원하십니다. 사람의 열정을 가지고, 사람의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사람의 혈육에서 나온 어떠한 덕과 어떠한 훌륭한 능력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혈육은 능히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느니라” (고전 15:50).

그런고로 사람의 혈육에 의한, 즉 사람의 힘에 의한 사람의 생명의 활동에 의한 도덕의 건설로는 참으로 하나님 나라다운, 거룩한 그 아드님의 나라의 생활을 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할 때, 성경에 가르친 “무엇을 하라”는 여러 가지 조건은 중생한 사람이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장성하면서 차츰차츰 나타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방법은 말씀을 배워서 말씀의 뜻을 깨닫고, 성신을 의지함으로 성신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서 이루어 나가십니다 (롬 8:1-4,8; 갈 5:16-17). 이것이 깨닫는다는 말인데, 그때그때 문제에 임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깨닫고 그것을 자기 힘으로 하지 않고 성신님을 의지하여 그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중략]

이렇게 해서 주님만을 전부로 삼고, 의지하고 나가는 이것을 신앙이라, 믿음이라 하는 말로 표시합니다. 믿음이란 말뜻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주님만 부여잡고, 자기는 전적으로 무능한 것을 알고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 김홍전, <중생자의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