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rnelius Incorporated into the Church

(Thoughts on reading  Ch.12 of “Do Not Call Anything Impure what God has Made Clean” by H. C. Kim)

Cornelius was a devout man who feared God. Was he regenerated before the gospel was proclaimed to him? We do not have enough evidence to give a definite answer. But regardless of the answer, God showed that he needed to know the full gospel. And by giving him the same Holy Spirit as was given to the Jewish Christians, God proved that Cornelius now shares the mission of the church — namely, giving and demonstrating the Kingdom answer to the world.

We know that spiritual ancestors like Abraham and David, to name a few, were also regenerated through faith based on the dim (but whole) revelation given at their time. But the revelation of God, through Jesus, has been now revealed as bright day light. And through Cornelius’ incident we see that God asks the generation with full revelation not to remain in dim light but to know the abundant truths given to the church through His completed written revelation.

Thus, it is a shame to remain knowing only half of the gospel, knowing Christ as someone who sends you to paradise after death; the gospel as a whole says that Christ has redeemed us from the slavery of darkness and incorporated us into His body, the Church, the Kingdom of Grace so that we can freely serve Him and bare the mission of His Kingdom as it marches in history toward its completion. All of this is based on the finished work of Christ on the cross.

Why Forgive

(This is a recollection of thoughts after reading “How Christ Walked on Earth” by Hong-Chun Kim.)

Here’s a well-known passage of a dialogue that went between Jesus and his disciples regarding forgiveness:

Then Peter came up and said to him, “Lord, how often will my brother sin against me, and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Jesus said to him, “I do not say to you seven times, but seventy times seven.” (Matthew 18:21,22; ESV)

Jesus’ words gives us the impression that we have no choice but to forgive.

Now, as it is for other aspects of Kingdom of God, forgiveness primarily takes place in the heart of one person—its outward appearance is not the ultimate measure of its genuineness. For instance, suppose your brother has a gambling problem and keep borrows your money to spend it in gambling. If you say “I forgive him” but inwardly hate him, you are not forgiving him. Or, even though you don’t hate him, if you don’t take actions to help him get out of the addiction, then you are not forgiving him out of love but jut giving up on him.

There is still another issue with forgiveness; that is, the ability to forgive; forgiveness only makes sense if you have the option to do otherwise, say, avenge, punish, etc. What if you don’t have those other options? Suppose someone beyond your power stole your property and you cannot do anything about it. So you decide to let go and forget about it. Can you say that you actively forgave the thief?

In fact, this issue does not vanish even if you do have other options, in the case where the thief is not that powerful and you can make him pay—because if you decide to make him pay, you should be able to evaluate his debt fairly and exactly. If you avenge on him more than he deserves, or for that matter less than he deserves, then you have executed injustice and have committed sin. “You shall have just balances, just weights, a just ephah, and a just hin” (Leviticus 19:36; ESV).

It is clear there is a fundamental lack of ability on us to perform just judgments. As the bible declares, “Moreover, I saw under the sun that in the place of justice, even there was wickedness, and in the place of righteousness, even there was wickedness.” (Ecclesiastes 3:16).

It is only the Holy One who can perform just judgment. No wonder we are required to “never avenge yourselves, but leave it to the wrath of God, for it is written, ‘Vengeance is mine, I will repay, says the Lord.’ ” (Romans 12:19)

Indeed, when Stephen was being stoned, he prayed “Lord, do not hold this sin against them.” Of course, the men who were stoning Stephen were sinning not only against Stephen but ultimately to God. Stephen here is humbly asking to pardon the evil they are doing to Stephen; not every single sin they committed to God; Stephen would have known well that he has no right to tell God what to do for the sins committed to God.

Going back to Peter’s question—”how often will my brother sin against me, and I forgive him?”—it seems that Peter is assuming that by forgiving his brother he is carrying out a virtue or merit. However, we know that we have no other choice but to forgive; by doing so we are not generating any virtue; it’s just a natural response to the fact that we have total inability to create justice and that God is the only dependable judge. Yes, we have an upright and just judge and He will not over pass any injustice that takes place in this world. The day comes when “each of us will give an account of himself to God.” (Romans 14:12)

아상(我相)대신 그리스도

요새 교회에서 저녁 예배 때는 욥기가 강설되고 있다. 아직은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을 보고 있다. 그 세 친구들의 얘기에는 부분적으로 옳은 얘기도 있으나 결론적으로는 그릇된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가지 가운데서도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이 세 친구들의 얘기에는 그리스도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의 생사화복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 세 친구들을 탓할 수 만은 없는 것은 그들이 살던 시대는 아직 계시의 초반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세상이야 윤리를 가르쳐도 나 개인을 얼마나 고귀하게 만드는가에 목표를 두지만, 그리스도인이야 자신이 죽어 마땅한 사람인데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시사 나를 용서하시고 그 분의 생명을 주셔서 이제 살 수 있게 하셨으니, 자기라고 할 게 뭐가 있는가. 모든 것에 대하여 ‘이것이 그리스도께 무엇이 되는가’가 중요한 판단의 준거고 또한 윤리의 잣대 아닌가.

하지만 항상 개인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습성이 깊이 베어 있는 것이 나인가보다.

사람이 어리다 또는 성숙하다는 척도는 얼마나 자기(自己)가 없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느냐 아닌가. 터무니 없이 어린 나를 본다. 하지만 나를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이 아니다.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항상 그를 바라보길…

“세상의 다른 종교와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중요한 것이 기독교는 분명한 하나의 목표를 세웠는데 그 목표는 자기 자신의 성화나 성성이나 자신의 안심입명이나 정신적인 평안을 찾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열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목표는 자기 자신이 어디로 떨어지든지 자신의 도덕적 향상이나 타락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하게 증거되며 그리스도의 거룩한 계획이 인류의 역사 위에서 찬연히 늘 빛나게 나타날 것인가 하는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 목표가 마음에 충만하고 분명했던 사람입니다.

— 김홍전, <사도행전 강해 3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신(神)개념의 진화?

성경을 비판하는 부류 중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대조시키면서 신(神)개념이 무자비하고 엄한 히브리 민족신의 모습에서 사랑이 많고 포용력 있는 전인류를 위한 신 모습으로 발전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 몇 가지만 되돌아보려고 한다.

(1) 아브라함의 기록

자주 등장하는 예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한 기록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인신제사를 요구하신 것일까? 아직 여러모로 인류 문화가 현대에 비해서 미개하였던 그 당시의 아브라함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했음직 하다. 그 때엔 다른 종교들 가운데 인신제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도 그런 제사를 원하신다고 생각한 것이다—바로 이러한 오해를 고쳐주시기 위한 것이 하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죽이려 하자 이삭에게 손 대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기 때문이다—이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제서야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셨다고 말하나, 그들이 간과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손 대지 말라고 하신 때도 역시 이삭을 죽이기 전이라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 것을 실제로 칼을 대기 전에 아신 하나님이시라면 애초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실 그 때에도 아셨을 하나님이시다. 고로,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 편에서 어떤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 편에 변화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결론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은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인신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가 분명하고도 여러번 선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깊은 의미를 담지 않으셨던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아브라함을 가르치셔야 했던 것일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1에서 말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치시라고 할 때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산제사”를 원하신다는 것을 직접 설명하시면 안 되는 것일까? 안 될 것이야 없겠지마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아브라함은 수 천년 전의 사람이며 계시의 초기 시대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제 완성된 계시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사도 바울의 글을 읽어도 다 이해가 안 되거늘, 아브라함에게 그런 예지와 통찰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 처럼 일종의 “체험 학습”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스라엘의 아말렉 숙청

사무엘상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이 아말렉 족속을 숙청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당시 모세를 통해 이미 받았던 명령이다. 아말렉의 치라는 이유는 그들이 그 지역의 매우 비열한 대강도단이었기 때문이었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는 설령 아멜렉이 그렇게 흉악한 범죄를 그 지역에서 오래 동안 저질러 왔다 하여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숙청하시는 것은 잔인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자연재해라든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원인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거두시는 일이 일어날 경우 그것은 잔인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 주위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통재(統裁) 아래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사 45:7) 역사 속에서 매우 드문 일이기는 하나 어떤 족속이 명맥을 잃고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일들이 있다—예컨대 마야인들이 그렇다; 지금도 마야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이유를 모르는데, 그들의 문명 속에서 발견하는 잔혹함을 볼 때 그들이 땅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잔인하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아멜렉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잔인하다고 느끼는 것은 생각에 오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그 내용을 다 모를 뿐, 또 모양새 만 다를 뿐, 하나님의 그 절대적 통치 대권의 발휘는 예나 지금이나 일관 되게 발현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현대에도 만일 한 사람 또는 단체가 나타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민족을 숙청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비판한다. 그러나 위에서 잠시 언급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는 기록된 계시가 (성경이) 완성됨으로써 종결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할 때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어디서 환상을 보았다든지 하는 사람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주장이 있다면 반박하기가 쉬울 것이다. 왜냐면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은 그들이 처했던 그 역사 시기, 역사적 사명 아래서 주어진 특수한 명령들이었기 때문이다. 특수한 경우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위에서는, 성경에 나타나는 신개념이 진화된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언급되는 대표적인 것들 두 가지만 살펴보았다. 이러한 내용들을 갖고 계속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그러한 긴 논술을 할 자리가 아니므로 간략한 소개로 마치려고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은 일관적이라는 사실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신관(神觀)에서 연유된 오해라고 본다.

(참조문헌: 김홍전, “사무엘시대1“)


말씀이 육신을 입으심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이 신비로운 글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에 대하여 적고 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했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 예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같은 본문 14절). 이와 관련하여 종종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은, 그럼 어째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느냐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24:36)

즉,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어째서 아버지는 아시지만 자신은 모르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가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기록한 것과 서로 상충 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이것은 근거 있는 질문인데—다만, 그 근거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자태에 대한 오해 위에 있을 뿐이다. 그 오해는 전에 쓴 글에서 약술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 비슷한데, 소위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이라는 껍대기만 쓰고 계셨던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겉모습만 사람이지 속에선 하나님의 모든 인격적 활동에 아무런 제한이 없으셨다는 식의 생각이다. 이러한 오해를 하면 위의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이 모순으로 들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셨고 동시에 그 분의 인격은 말씀이신 하나님께 종속된 것이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말씀이신 하나님께 종속되었기에 죄가 없으시다. 또한 참 사람이셨기에 사람이 갖고 있는 연약함을 (죄성만 빼고) 다 경험하신 것이고 이것은 인격적인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면 사람은 인격과 육체가 분리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처음 육신이 되어 오셨을 때엔 그 인격적인 활동에 있어서 상당한 제한을 경험하신 것이다. (그렇게 제한을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지와 통찰력을 가지셨음은 두 말 할 나위 없다.) 이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을 바로 생각할 때 마태복음 24:36은 전혀 모순 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예수께서 더 이상 아무런 물리적 제한을 받지 아니하시는 영광스런 육체를 부활 후 입으셨을 때는 이러한 문제가 없어졌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 하신 다음 말씀에는 자신은 모르신다는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는 것이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7,8)

위의 말씀에는 구원의 경륜을 성부 하나님께서 구상 하신다는 직분상의 구분을 언급하셨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 영광의 보좌에 오르셨다든지, 마지막 날 그 나라를 아버님께 바친다고 하는 성경의 기록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메시아의 직분과 관련된 이야기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말씀이신 하나님의 본질과 관련된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런 오해를 하면 이러한 성경의 기록들이 통일성 있게 바로 이해되지 못 할 것이다.

(참고문헌: “내 증인이 되리라“, 김홍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