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자의 생활

하나님의 자녀가 장성하는 자태는 말씀이 들어가면 성신님이 그 말씀을 쓰셔서 그에게 힘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각오와 각성이 있게 하셔서 그가 ‘아,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나는 이렇게 하려 해도 그 일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고,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네 힘으로도 못하고 능력으로도 못하고 오직 성신으로만 하는 것이다”(슥 4:6) 하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신을 좇아 행하라”(갈 5:16). 성신님을 의지하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대로 내가 “아니요” 하고 반대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령하고 거룩한 자태와 하나님 자식다운 자태를 생활 가운데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종교나 혹은 세상의 도덕이 하라고 하는 것을 그대로 준행해서 이루어 놓은 자태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도덕에서는 “너는 열심을 내라, 부지런해라, 마음을 고정해라,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교훈할 때, 사람은 그 교훈대로 수양하고 노력해서 상당히 그런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차츰차츰 그런 덕이 많이 쌓여지면 도덕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도리도 그런 식으로 하나씩 쌓아올릴 수 있느냐 할 때, 쌓아올려서 만들어 보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중생의 도리를 잘못 깨닫고 성경이 가르치는 여러 교훈을 잘 지키라, 죄를 함부로 짓지 말라, 부지런히 하라, 열심으로 교회를 섬기라, 남에게 신실하라, 친절하라, 마음을 항상 고정하라, 이런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면 ‘아, 그래야겠다’ 하고 하나하나를 노력해서 해 보려고 하기는 합니다. 마치 세상 사람이 어떤 도덕적 교훈을 노력하여 실천해 보려는 것과 같이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다운 모양을, 그런 인격적인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으나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사람의 자연스러운 장성의 자태가 아님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사람의 자연스러운 장성의 자태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느껴야 하는 것이고, 하라고 말씀하시는 일들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부지런하라” 해서 내가 가진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을 가지고 부지런히 산다든지, “정직하라” 해서 내가 가진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으로 정직히 행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경지, 그 순결, 그 부지런을 원하십니다. 사람의 열정을 가지고, 사람의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사람의 혈육에서 나온 어떠한 덕과 어떠한 훌륭한 능력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혈육은 능히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느니라” (고전 15:50).

그런고로 사람의 혈육에 의한, 즉 사람의 힘에 의한 사람의 생명의 활동에 의한 도덕의 건설로는 참으로 하나님 나라다운, 거룩한 그 아드님의 나라의 생활을 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할 때, 성경에 가르친 “무엇을 하라”는 여러 가지 조건은 중생한 사람이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장성하면서 차츰차츰 나타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방법은 말씀을 배워서 말씀의 뜻을 깨닫고, 성신을 의지함으로 성신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서 이루어 나가십니다 (롬 8:1-4,8; 갈 5:16-17). 이것이 깨닫는다는 말인데, 그때그때 문제에 임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깨닫고 그것을 자기 힘으로 하지 않고 성신님을 의지하여 그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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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주님만을 전부로 삼고, 의지하고 나가는 이것을 신앙이라, 믿음이라 하는 말로 표시합니다. 믿음이란 말뜻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주님만 부여잡고, 자기는 전적으로 무능한 것을 알고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 김홍전, <중생자의 생활>

예수님을 사랑함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느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한 사람이 중생하였다는 말은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생명 곧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요 10:28). 이 새생명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은 그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를(골 3:4)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중생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실의 한 가지입니다. 중생한 자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으니까 더 사랑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마 10:37). 여기에서 너희 부모나 처자나 형제를 사랑하는 식으로 나를 사랑하지 말고 별다른 식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부모나 처자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연장해서 더 열렬하게 나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는 내가 부모, 형제, 친구를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그런 사랑이 있으면 그것으로 비추어 봐서 그런 사랑이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흘러나가고 있는가; 그렇게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별 종류의 사랑을 따로 이야기한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 향한 사람의 사랑은 공중에 따로 떨어져 있는 그런 심정이 아니고, 결국 인간의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 김홍전,

하나님 나라의 도덕은 결코 개인의 완성을 추구하지 않음

여기서 우리가 중요히 생각할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에게 선하라든지 의로우라든지 진실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요컨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각고면려하고 노력해서 의나 선이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종교가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의 종교가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고,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의 종교도 정통이나 복음주의라는 이름 아래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진실하라 할 때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경계냐 하면 성경은 도달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스스로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사람의 본질적인 부패와 타락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원하는 이것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저것밖에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롬 7:19 참조) 그런고로 아무리 선미(善美)를 원할지라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얻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비록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할지라도 원하는 이것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저것만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법칙이 우리에게 있어서 그 죄의 법칙이 우리를 지배하니까 그렇다고 했습니다.(롬 7: 23-25 참조) 죄의 법칙이 있다는 걸 무시하고 사람이 스스로 고고한 경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망상과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신을 의지해서 도달해 보겠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목표가 그릇되면 안 된다는 것을 또 하나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개인이 의롭고 선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그 개인만으로는 완성되지도 않을뿐더러 개인만으로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이 늘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의 도덕적 완성이나 개인의 인격의 완성이라는 것은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지 기독교에서는 안 가르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 나라의 도리가 가르치는 것은 개인의 완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의 완성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나라는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신령한 몸의 완성에 따라서 같이 완성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자신 하나하나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 최후에 가서 완성됨으로써 비로소 내가 도달해야 할 그 의롭고 선하고 아름답고 참된 위치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덕은 개인 향상 위주의 개인주의적인 도덕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 사상을 우리가 깊이 생각할 때에 항상 개인을 중점으로 생각하는 사상은 비신국적(非神國的)인 사상입니다. 그렇게 배우든지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요컨대 하나님 나라의 큰 사상의 내용을 기저로 해서 성경을 소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것은 착해라, 의로워라, 혹은 참되라, 아름다워라 하는 뜻이다’ 하고 자기가 얼른 지레짐작하는 까닭에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전체의 기조 위에서만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이 크게 목표를 세워서 가르치는 그 터 위에서 그 다음의 자자하고 세세한 문제도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큰 문제를 떠나서 늘 부분만 우선적으로 잡고 해석할 때에 큰 오류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중략]

그러한 많은 것을 저 자신이나 여러분이 다 경험했는데 이 나라뿐 아니라 저 나라에 가서 사방에 다니면서 들을 때 항상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가? 기독교도 결국 개인의 구원과 개인의 인격적인 완성이 최고의 목표인가? 그러면 다른 종교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목표나 가지고 있는 구상이 어떻게 다른가?’ 하고 한번 질문하고 자꾸 의문을 캐 볼 때 성경은 “너 하나를 위해서 거룩한 도리가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김홍전,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삶>

하나님을 사랑함

예수님께서 시험을 물리치실 때 중요한 문제로 드신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진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배고픈 것은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무시하고 자기의 지혜를 믿고 신통력을 발휘해서 미리 전시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를 나누어서 하나님께도 드리고 다른 것에게도 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큰 글자라는 사실이야 말로 예수님이 항상 가장 강한 근거로서 유지하려 했던 명확하고 찬연하게 비치는 보루와 요새였습니다. 예수님은 늘 거기에 서 계셨습니다.

— 김홍전,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고린도전서 15:2)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5장에서 부터 7장 까지 기록되어 있는 바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결미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산상보훈 가운데 주님께서는 여러번 하나님을 지칭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또는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여기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님의 그 독특한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 말씀과 관련해서 몇 가지만 정리하고 싶다.

첫째,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의 뜻을 항상, 부족함이 없이, 안다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혹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혹 행할 능력이 있어도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고’(요 3:13)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완전하게 아시고 충만히 이루신 분은 오직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일컬음을 받으신 예수님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길 뿐이다.

둘째. 예수님이 주(主)이신 것과 그 분과 관련된 것들을 틀림없이 믿고 또 그것들을 가르치며, 귀신을 내어 쫓은 권세를 받고 또한 크고 훌륭한 일들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원 받은 증거는 되지 않는다. 물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약 1:7).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권능을 받고, 그 분의 나라를 위한 크고 훌륭한 일들을 행하는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이 구원의 열매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오히려 구원의 가장 큰 열매는 다시 태어남이며, 이로 인해 어둠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드님의 나라로 옮기웠다는 큰 사실의 실증이다.

셋째. 사람은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의지해서는 아니 된다. 자신이 성경의 여러가지 사실들을 믿고 있다 할지라도, 주 예수님의 이름을 힘 입어 기적을 행했을지라도, 혹 그 분 나라를 위한 권능을 행하였다 하다러도, 그런 것이 구원의 보증이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은 것을 가지고 주님께 인정 받으려고 한다면 그와 함께 나의 모든 죄악들도 공정하게 평가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결과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사 64:6) 그것을 모르고 천국에 들여 보내달라고 하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주님의 능력으로 한 것을 자기의 것으로 인정하니 또한 불법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구원의 반석이시다.

- 김홍전 박사님의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