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들 처럼

“우린 아이들 처럼 그렇게 살아가요.

모든 것을 믿고 맡기잖아요”

- 좋은씨앗, “어린 아이들 처럼” 중에서

우린 고아들이 아니므로 이 세상의 수많은 고아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고민하며 마치 부모 없는 자식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벌써 우리의 것이므로 우린 혼자 힘으 무엇을 이루어 가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고아들처럼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매일 자기가 벌어 먹어야 하는 고아가 어째서 항상 풍족한 부자 집 아들을 멸시한단 말인가? 어째서 자유의 아들이 종들을 부러워하랴.

 

일찍 일어나기

나는 아침 잠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의 욕망을 이길 인내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잠을 이기지 못해서 그렇다기 보다는, 그 전날 늦게 까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 욕망을 이기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잠을 못 이긴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 밤에는 졸음이 와도 잘도 이겨낸다. 그 결과 아침에 일어나려고 하면 몸이 천근 같이 느껴질 뿐이고 설령 일어나도 하루 종일 정신이 몽롱하다. 깨어 있어도 능률이 형편 없는 것이다.

일찍 자는 것이 관건이다. 아침에 부지런하게 일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전날 부지런히 일을 마쳐서 밤에 후회 없이 일찍 잘 수 있어야 한다. 낮을 게으르게 보내면 괜히 밤에 무엇을 하겠다고 난리를 치게 된다.

이것을 생각하면 하루는 참으로 짧다. 버릴 시간이 없다. 일을 부지런히 마쳐서 저녁에는 쉴 준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잠자기 직전까지 육체적 정신적 활동을 과하게 하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에게 잠을 주셨을까 이유를 몇 가지 찾을 수 있지만, 가장 현실적인 이유를 들자면 사람이 숙면을 취할 때 뇌는 세포들을 치료하기 시작하고 낮에 모았던 정보를 정리한다 — 마치 도서관에서 마구 뽑혀진 책들을 서고에 정리하듯이 말이다. 충분한 잠은 창조력과 능률을 위해 필수적이다.

제대로 믿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자신이 단순히 예수님과 관련된 교리를 승인하는 정도의 믿음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 그 분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지 구분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차이점을 깨달은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내가 제대로 믿고 있는가 아닌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았으면 깨달은 만큼 예수님께 모든 짐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그 분 앞에서 내가 제대로 믿고 있는가 아닌가 고민한다는 것은 참으로 믿으려고 하는 소치가 아니라 여전히 “나는 제대로 믿고 있다”는 자기(自己)를 확인하려는 아상(我相)에 불과하다.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드리자. 예수님의 인자하신 품에 안기자.

표현

나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표현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언제나 강조되어야 하고 또한 평생 배워야 할 것이 국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어휘력이다. “기쁘다”는 말은 “벅차다” 또는 “행복하다”는 말과 결코 같지 않다. (아직 까지 우리 나라에 내놓을만한 유의어 사전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자기 속에 있는 그 독특한 감정 또는 생각을 적절하게 표현할 단어를 능숙하게 쓸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가 말싸움을 할 때 “네가 아까 그렇게 말했잖아!” “내가 언제 그랬니!”와 같은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 어휘의 지경을 풍부하고 넓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읽어야 한다, 시를 노래해야 한다. 그리고 써야 한다.

언어 없이 사고는 불가능하다. 사상과 언어는 직결되어 있다. 개념들이 대충 잡혀 있는 사람의 언어는 부정확하다. 생각이 혼란스러운 사람의 말과 글은 파편적이고 어지럽다.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설명은 간결하고 명쾌하다.

수학의 유익 역시 이러한 선상에 있다. 특히 추상적인 개념을 정의하고 그것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다루고 표현하는 훈련과 언어를 제공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생각과 표현을 두루뭉실하지 않고 정연하게,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확하게 하는 훈련을 제공한다.

수학자들을 만나면서 감화를 받는 것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고 설명하려 애쓰는 것과 또 그렇게 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태도다.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설명력 부족으로 일차적 원인을 삼는 자세이다.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학계에는 이러한 분위기가 강하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학생이 아무리 쉬운 질문을 해도 “그건 전에 설명했던 것이잖아”라는 대답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수학자들은 대개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어떤 곳에서는 자기가 하는 일이 얼마나 지적(知的)으로 높은 수준의 것인지를 상대에게 보이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는 분위기가 강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곳에서는 인간적인 분위기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함께 알아간다’는 것 보다는 ‘누가 옳으냐’에 집중하게 된다. 아무리 내가 옳다고 생각해도 그것을 상대가 알아 듣지 못하면 과연 나는 바로 이해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수학계에서 글쓰기와 강의법이 무척이나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보며 느끼는 것이다.

집사 선출

오늘 저녁 교회는 모여서 집사를 선출한다. 집사의 필요를 교회가 느껴오던 차에 이번에 선출하게 된 것이다. 지난 2 주에 걸쳐 강단에서는 집사직의 성격과 요구되는 자질이 가르쳐졌다. 몇 명이 임명 될지는 모르겠지만 세움을 입은 분들에게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이 있기를 (딤전3:8), 그리고 또 주님께서 그들의 봉사를 충분히 받으시길 소망한다.

바쁜 세상, 자주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이러한 계기로 교회가 주중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또 찬송드리며 어떻게 주께 더욱 효과적으로 봉사할까 고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가 된다.

 

추가: 두 명의 성도가 집사에 선출되었다. 두 분 모두 신실함을 증거해 왔다. 앞으로 2주 안에 이들은 직분을 맡을지 결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