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

나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표현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언제나 강조되어야 하고 또한 평생 배워야 할 것이 국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어휘력이다. “기쁘다”는 말은 “벅차다” 또는 “행복하다”는 말과 결코 같지 않다. (아직 까지 우리 나라에 내놓을만한 유의어 사전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자기 속에 있는 그 독특한 감정 또는 생각을 적절하게 표현할 단어를 능숙하게 쓸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가 말싸움을 할 때 “네가 아까 그렇게 말했잖아!” “내가 언제 그랬니!”와 같은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 어휘의 지경을 풍부하고 넓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읽어야 한다, 시를 노래해야 한다. 그리고 써야 한다.

언어 없이 사고는 불가능하다. 사상과 언어는 직결되어 있다. 개념들이 대충 잡혀 있는 사람의 언어는 부정확하다. 생각이 혼란스러운 사람의 말과 글은 파편적이고 어지럽다.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설명은 간결하고 명쾌하다.

수학의 유익 역시 이러한 선상에 있다. 특히 추상적인 개념을 정의하고 그것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다루고 표현하는 훈련과 언어를 제공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생각과 표현을 두루뭉실하지 않고 정연하게,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확하게 하는 훈련을 제공한다.

수학자들을 만나면서 감화를 받는 것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고 설명하려 애쓰는 것과 또 그렇게 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태도다.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설명력 부족으로 일차적 원인을 삼는 자세이다.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학계에는 이러한 분위기가 강하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학생이 아무리 쉬운 질문을 해도 “그건 전에 설명했던 것이잖아”라는 대답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수학자들은 대개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어떤 곳에서는 자기가 하는 일이 얼마나 지적(知的)으로 높은 수준의 것인지를 상대에게 보이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는 분위기가 강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곳에서는 인간적인 분위기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함께 알아간다’는 것 보다는 ‘누가 옳으냐’에 집중하게 된다. 아무리 내가 옳다고 생각해도 그것을 상대가 알아 듣지 못하면 과연 나는 바로 이해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수학계에서 글쓰기와 강의법이 무척이나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보며 느끼는 것이다.

집사 선출

오늘 저녁 교회는 모여서 집사를 선출한다. 집사의 필요를 교회가 느껴오던 차에 이번에 선출하게 된 것이다. 지난 2 주에 걸쳐 강단에서는 집사직의 성격과 요구되는 자질이 가르쳐졌다. 몇 명이 임명 될지는 모르겠지만 세움을 입은 분들에게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이 있기를 (딤전3:8), 그리고 또 주님께서 그들의 봉사를 충분히 받으시길 소망한다.

바쁜 세상, 자주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이러한 계기로 교회가 주중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또 찬송드리며 어떻게 주께 더욱 효과적으로 봉사할까 고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가 된다.

 

추가: 두 명의 성도가 집사에 선출되었다. 두 분 모두 신실함을 증거해 왔다. 앞으로 2주 안에 이들은 직분을 맡을지 결정하게 된다.

 

잠시 앉아서

개강한 후 많이 바빠졌다. 따로 수업을 듣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공부할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니 수강 여부는 생활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여유로울수록 더 게을러지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지 않는가?) 서둘러 익혀야 할 분야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남아 있는한 학생이 여유를 부릴 수는 없다.

특히 이번 가을에는 Noncommutative Geometry(“못 바꿔침 꼴” 식으로 순 우리말로 얘기해도 당장 이해는 안 된다)의 기본 아이디어를 이해하여 주 전공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Commutative냐 Noncommutative냐, 그것을 정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려는 다음 한 걸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항상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나의 옛 사람이다. 과연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현실이 내게 나타나고 있는지; 나의 심정에 부모 형제 처 자식, 심지어 나의 생명 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정신이 있는지; 나의 행복이라든지 유익이라는 것을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주를 좇아 매진 하겠다는 확고한 정신이 서 있는지; 언제나 이것이 문제다. 주께서 인도하시는 길 가운데 있는 여러 가지 방해 거리가 문제이긴 커녕 그 시작, 그 근본, 과연 내가 주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가 가장 큰 문제요 실상은 기독교인이 갖고 있는 고민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가.

거기서 끝이 아니다. 과연 나는 무엇 때문에 주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가. 그것이 나 개인의 윤리 또는 인격 완성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것이라면 여전히 구하여도 무엇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주의 인도를 받아야만 하겠다는 강한 의지는, 첫째도 하나님의 나라, 둘째도 그리스도의 몸, 셋째도 교회의 역사적 전진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나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도, 실행할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느낌과; 따라서 성령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과 힘 주심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진심과 동시에 거기로 가지 않을 수 없는 확고한 의무감; 그 때문에 성신님의 인도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다가 별 다른 수가 없으면 대충 봐서 나아가겠다는 두 마음 없이 확실히 그분의 인도하시는 힘찬 손을 기다리겠다는 진정성; 이러한 것들이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와 자비만이 일을 성취하는 것이다.

인생 장기 계획

유학생들을 만나보면 자기 인생을 어떻게 개척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구상과 각오가 각별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실은 유학생 뿐 아니라 어느 젊은이가 안 그러겠는가. 또한 그것은 세상의 윤리 도덕이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성도가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해석해 나가는 것이 옳겠는가. 바울 선생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고 없다고 가르쳤는데, 성경을 이용하여 인생의 장기 계획을 세우려는 기풍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내가 지금 까지 이룬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표기하고 그 위에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주님은 헌 옷 위에 새 것을 깁지 않는다고 하셨다 — 즉,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라고 하는 것이 도무지 없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무의식 속에 거룩한 것을 가지고 자기를 복스럽게 하려는 심정을 품기가 쉽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자기” 곧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제 사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접붙힘 받은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 — 곧 교회의 거룩한 행보에 요구되는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자꾸 하나님과 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을 얼마나 값지게 살다 갔는가에 집중하여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성경의 큰 주제, 큰 가르침에 맞지 않다. 한 예로 삼손이 어찌하여 믿음의 용사로 칭찬 받고 있는지는 구약 교회의 사명과 그 속에서 맡은 삼손의 역할을 이해하지 아니하고서는 바로 파악할 수 없다.

개인의 가치를 무시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기독교의 가르침은 개인의 인격 완성이 아닌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덧글: 마라톤맨 님의 블로그에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오늘을 위하여 살라“는 설교 일부가 올라와 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약 4:13-17)

추상과 실체

하나님 나라의 도리들이 그저 입으로 전해졌을 때는 그 내용이 상당히 추상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 부터 시작하여 죄 사함이라든지 구원, 성령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라고 하는 것 등의 내용이 다 그렇다.

그런데 그런 추상적인 것들을 실체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여주신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은혜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체득하게 하시고 또 그로 인해 믿음을 만들어 주시는 것이 성령님의 은혜이리라. (사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진리’란 반드시 실증을 전제로 하고 있다.)

보이는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분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증케 하심을 본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어떤 잘못을 범해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래서 되겠나” 또는 “이렇게 죄를 지으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와 일부에게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하는 차원에서의 책망이 있다. 보이는 교회는 분명 그리스도와 함께 나는 죽고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일부로 산다는 진리를 실증하는 자리임이 분명하다.

어린 아이임을 너무나 분명히 느낀다. 아직도 한 없이 부족한 위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