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Grace Alone — The Only Motivator For True Holiness

But this exhortation teaches us, that until men really apprehend how much they owe to the mercy of God, they will never with a right feeling worship him, nor be effectually stimulated to fear and obey him. It is enough for the Papists, if they can extort by terror some sort of forced obedience, I know not what. But Paul, that he might bind us to God, not by servile fear, but by the voluntary and cheerful love of righteousness, allures us by the sweetness of that favor, by which our salvation is effected; and at the same time he reproaches us with ingratitude, except we, after having found a Father so kind and bountiful, do strive in our turn to dedicate ourselves wholly to him. [...] Where then are they who think that all exhortations to a holy life are nullified, if the salvation of men depends on the grace of God alone, since by no precepts, by no sanctions, is a pious mind so framed to render obedience to God, as by a serious meditation on the Divine goodness towards it? — Joh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2:1

It is naive to think that if a soul falls into hell that s/he would repent; nay, it is more likely that s/he will grind his/her teeth with anger toward God and the gospel of Jesus Christ.

구원이 사람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기인할 때만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큰 동기를 부여 받는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어떤 영혼이 지옥에 떨어진다면 뒤늦게 나마 후회하며 회개하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유치한가? 회개하기 보다는 도리어 하나님을 향한 이 갊이 더 심해지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부인하는 마음만 키우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1서 4장 1-2절 일부)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육체 가운데 죄 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잘못된 가르침들을 경계했다.

그 때와는 조금 다르지만, 오늘날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의미 보다는 그 분의 삶이 보여주는 영적, 정신적, 혹은 윤리적인 교훈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사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사신 것과 그 분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의 관계를 잊어서는 아니 되겠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이심을 시인하지 않고 그 분께서 사랑과 나눔의 본을 보여 주신 것으로써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오늘날 어떤 사람들의 움직임을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도의 말 처럼 그것은 참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적그리스도의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를 쏟으신 것은 그 안에서 우리도 함께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다. (로마서 6장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에 참예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식으로 살 수 없다. 오직 그의 성신으로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Yet Christ is not simply to be viewed as our example, when we speak of the mortificaion of the flesh; but it is by his Spirit that we are really made conformable to his death, so that it becomes effectual to the crucifying of our flesh. [그러나 우리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것을 이야기 할 때 그리스도를 단순히 우리의 모범으로써 보아서는 안 된다; 오직 그 분의 성신으로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 정말로 참예하게 되며, 그리하여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이 유효하게 된다.]
— John Calvin, Commentary on 1 Peter 4:1 [칼빈, 베드로전서 4:1 주석]

성경의 도덕적 교훈은 세상의 교훈과 어떻게 다른가

아래는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삶” (김홍전 著, 성약출판사) 제 10강 가운데 일부이다. 김홍전 박사가 1968년 2월 4일 주일 아침 성경 공부 시간에 전달한 내용이다. 이러한 깊은 통찰력은 참으로 하나님의 성신께서 주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거룩한 교회에 주신 역사적인 신앙과 신학을 우리 말로 공부할 수 있게 조국 교회에 이런 교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기초적인 내용인데, 어리석은 우리는 자칫 잊어버리고 타락하기 쉬우니, 교회는 꼭 숙지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결과 ‘이것이 하나님의 선이고 의다’ 한다면, 거기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그것은 한 개의 철학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것을 따른다면 철학자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바 선하고 의롭다는 것을 그대로 따라 나아가는 것과 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철학자가 ‘나는 이것을 선으로 규정하고 이것을 신이라고 생각한다’ 하는 반면에, 기독교인은 ‘신이란 이러이러한 분으로서 나는 선이나 의를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한다면, 거기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붙기는 했을지라도 사람들이 나름대로 생각하여 자기가 이리저리 그렇거니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절대로 참된 하나님의 선과 의의 자태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것은 철학입니다. 거기에 종교적인 요소를 가미한다면 결국 종교적인 선일 뿐입니다.

어떤 도덕가가 말한 교훈과 비슷한 이야기를 성경도 말했다고 이야기한다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선미(善美)의 특성을 드러내게 되느냐 하면 그것은 아주 생각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교사들이 하나님의 선미의 특성을 드러낸다고 하면서 성경을 인용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보면 성경을 모르는 세상의 도덕군자나 철인(哲人)들이 한 말과 비교할 때 더 나을 것이 별로 없는 말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언제든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는 말씀은 여러분이 아주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은 종교적인 친구들끼리 모여서 음식을 내놓고 식사 기도를 할 때 붙이는 정도의 말씀이 아닙니다. [...] 먹고 기운을 내서 나중에 좀 더 종교적으로 봉사를 함으로써 먹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먹고 기운 내서 무엇을 하는 것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먹고 마시는 항다반의 생존 방식들은 선하고 악한 문제가 아닙니다. 먹는 것 자체야 선하다든지 악하다든지 할 것이 없습니다. [...] 사람의 생존에 기본으로 필요한 생리적인 작용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것은 선하다든지 악하다든지 하는 도덕적인 문제로 평가할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 그러면 먹고 마시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생존을 위해 그러한 기본적인 방식이 필요한 사람으로서 너는 숨쉬고 식사하고 잠을 자는 항다반의 생활 방도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목적 의식하에서 취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일에서 너는 선하고 어떤 일에서는 악하다 하지 않고 그처럼 가장 기본적인 자기의 생존 방도조차 어떤 도덕적인 평가를 할 위치에 놓아둔다면, 그 여타의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확실한 도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먹는 것조차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 할 것 같으면 먹고 기운을 내서 쓰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먹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 요컨대 우리의 도덕적인 기저 혹은 자리는 이 세상 사람의 도덕적인 위치와 같은 차원이나 같은 터 위에 있지 않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령 ‘부지런해라, 게으르지 말아라, 무엇을 열심히 해라’ 하는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도 항상 별다른 차원 위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부지런해야 하듯 너희도 부지런해라 하는 말도 아니고 이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식의 게으름을 갖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여러 가지 것들이 다 독특한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자리를 달리하고 베푸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 평가의 자리 혹은 행동할 수 있는 기초는 세상이 생각하는 그것과는 전연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도덕 판단의 자리는 세상의 도덕적 교훈과는 전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도덕 교훈을 이야기할 때 이 세상의 도덕과 비교해서 좀 더 낫다든지 못하다든지 하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정당한 것입니다. 세상의 도덕은 소극적인데 이것은 적극적이다 하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의미 없는 이야기입니다. 소극적이라든지 적극적이라든지 하는 것과 상관없는 딴 세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항상 이런 점을 우리가 먼저 명심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많은 실천 사항의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은 그것을 실천할 사람의 자격이나 능력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체를 세상 사람과 다른 위치에 놓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불신자보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으라’ 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자에게 해당되는 도덕 교훈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신자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정열을 쏟아서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내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런 점을 특별히 생각하면서 좀 더 공부해 나가십시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주께서 저희를 새로운 생명으로 지으시사 새사람으로서 새로운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무엇이든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또 길을 가게 하셨사옵나이다. 저희에게 주신 모든 거룩한 교훈들이 새 세계의 규칙이지 결코 묵은 옛 세상에 있는 규범이 아닌 것을 저희 교우들이 잘 깨닫고 터득해서, 여러 가지 현실적인 듯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냥 보통의 인간적인 능력으로 그것을 시행하라는 것이 아닌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여 주시고, 그리하여 주께서 저희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도덕적인 위치에서 늘 떠나지 않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성이면 감천(至誠感天)했던 것이 언제였나 When did God help those who helped themselves?

[English translation at the end.]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안 들어본 사람 없을 것이다. 영어 속담에도 비슷한 것으로 “God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라는 말이 있다. 참으로 세상에 널리 퍼진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 나라와는 대척적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열심으로 기도하고, 전심으로 찬송하고, 선을 위해 각고면려한다 해도,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께서 가납하실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사야 64:6)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그 무엇도 없으며 만들어 낼 수도 없다는 빈곤함과, 하나님의 법을 훼손한 것, 그리고 그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은 영벌을 요구한다는 것들을 자각하고 슬퍼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첫걸음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3-4)

하지만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내에서도 ‘당신에겐 하나님께서 가상하다고 인정하실 부분이 있다’는 식의 ‘위로신학’이라고 할런지 혹은 feel-good-theology 라고 부를 사상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이런 진실한 마음을 하나님은 알아주시겠지’ 혹은 ‘내 잘못은 영벌에 해당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비슷한 생각들이다. 성경으로 뒷받침할 수 없는 신학이다. 성경은 말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세기 6:5)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창세기 8:21)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아 17:9)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 (잠언 20:9)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욥기 14:4)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7)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데살로니가후서 1:8-9)

우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묻지 않아도 될 부분이 한 군데도 없는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없는 자들의 부유함이 되시고, 또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자들의 위로가 되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디모데전서 1:15)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1서 4:10)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8-14)

하늘을 감동시키고 인정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마태복음 3:17 참조). 그 결과 죽음에서 일으키심을 받아 천상천하의 대권을 받으셨고,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에게 피하는 것이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가장 겸손한 자세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편 2:11-12)

Continue reading

‘역사적 예수’는 예수가 부활하지 못했다는 가정 하에 출발함

역사적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재한 나사렛 예수를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종종 말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예수는 부활한 예수 곧 지금 살아계셔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예수이다. 그러므로 소위 역사적 예수를 찾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참된 역사적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수긍할 수 있는 2000년 전의 예수의 행적을 재구성 해보겠다는 노력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