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는 하나다 (유아세례와 성인세례가 따로 있지 않음)

언약신학의 기본적인 내용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언약의 확실함을 알리시는 방도 중 하나로 눈에 보이는 예식들을 제정하셨다. 이러한 성례전( 聖禮典)들은 언약공동체에게 주신 언약의 표(表, sign)가 된다. 그 표가 상징하는 것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인(印, seal)으로서도 작용한다.
  2.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할례와 유월절 만찬이 언약공동체에게 주신 성례전이었다. 할례는 입문 (enterance) 예식이고, 유월절은 새롭게 (renewal) 하는 예식이다.
  3.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할례와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하신 것이 세례와 성찬이다.
  4. 구약과 신약의 구분은 언약을 성취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후의 시기적 구분이지, 두 개의 다른 언약을 믿은 것이 아니다. 구약과 신약의 교회는 시공간을 넘어 동일한 언약을 믿는 하나의 언약공동체이다. 그러므로 할례, 유월절, 세례, 성찬 모두 동일한 언약의 성례전들이다.
  5.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성례전 시행에 있어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어도 큰 원칙은 연계가 된다 — 예를 들자면 세례와 성찬은 각각 신약 교회의 입문 예식과 새롭게 하는 예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공동체에서 태어난 자녀들 역시 공동체에 일원으로 여기고 입문 예식을 베풀며 (구약: 할례, 신약: 세례), 새롭게 하는 예식은 그 의미를 분명히 각성하는 사람들에게 베푼다 (구약: 유월절, 신약: 성찬).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 정리한 글을 전에 올렸다.)

이 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유아 할례와 성인 할례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듯이, 유아 세례와 성인 세례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 에베소서 4:5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인(成人)이 처음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 그가 하나님의 언약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고 세례를 베푸는 것 처럼, 어미 뱃속을 통해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 역시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고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세례가 성인이 되어 받은 세례 보다 못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 자녀가 믿음도 없이 부모 때문에 세례를 받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때도, 신약 때도, 그 분의 은혜로운 언약 앞에서 어린 아기도 성인도 구별하지 않으신다 (신명기 29:10-15; 사도행전 2:39).

믿는 자의 가정은 믿지 않는 자녀에게 선교하는 장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성도의 교통을 하는 장이다. 믿는 자의 가정 예배는 믿지 않는 자녀가 참관하는 시간이 아니라, 성도들이 모여 같은 아버지께 절하고 언약의 복을 나누는 시간이다. 믿는 자의 자녀 교육은 전도가 아니라, 어린 성도의 몸과 영혼이 자라는 것을 돕는 참된 섬김이다.

할례와 유월절 만찬, 세례와 성만찬의 연계

창세기 3장을 보면 태초의 사람이 범죄한 직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운 구원의 약속을 하신다. 구약의 교회는 그 은혜의 언약을 이룰 자손을 믿음으로 기다리던 언약공동체였고, 신약의 교회는 그 자손 곧 그리스도가 이미 오셨다는 것을 믿는 언약공동체이다 — 즉, 신구약의 교회 모두 시공간을 넘어 동일한 언약을 믿음으로 지키는 하나의 공동체이지, 마치 옛 언약과 새 언약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 약속의 확실함을 눈에 보일 수 있는 형태로 되새길 수 있는 예전(禮典)들을 제정하셨는데,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것이 할례와 유월절 만찬이었고,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그것들을 새롭게 하신 것이 세례와 성만찬이다. 이번 글에서는 언약신학의 이러한 기본적인 내용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오늘 너희 곧 너희의 수령과, 너희의 지파와, 너희의 장로들과, 너희의 지도자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 있는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이니” — 신명기 29:10–15

1. 인류의 타락 이래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언약은 단 하나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세기 3:15). 이를 은혜의 언약(covenant of grace)라고 한다. (“은혜”의 언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람에게 어떤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2. 은혜의 언약을 간직하는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를 수 있으나, 여기서는 언약공동체라고 부른다.

3.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언약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은혜의 언약을 상기시키시고 새롭게 다짐시켜주셨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새롭게 해주신 것이 창세기 15장에 기록되어 있다.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서 나온 언약공동체에게 새롭게 해주신 것이 신명기 29장에 기록되어 있다.

4. 언약을 새롭게 하시면서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언약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언약의 표(sign)와 인(seal)으로서 작용할 의식을 제정하시기도 하신다. 이를 성례전이라고 부른다.

4.1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새롭게 하실 때에는 언약공동체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도록 하셨다.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누구든지 받아야 했다 (창세기 17:12). 자기 의사를 분명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받지 않겠다고 하면 언약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줄 수 없었다 (창세기 17:14).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아기들의 경우, 언약공동체의 구성원에게서 난 아기라면 할례를 베풀어 주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셨다 (창세기 17:13) — 언약공동체에서 태어나는 아기들은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연스럽게 보내신 사람들로 여겨야 함을 이런 데서 배울 수 있다.
4.2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서 나온 언약공동체에게 언약을 새롭게 하실 때에는 할례와 더불어 유월절 만찬을 성례전으로 제정하셨다 (출애굽기 12:14).
4.3 유의할 것은 할례의 예식은 아기들도 참여할 수 있었지만, 유월절 예식의 경우 (유아들은 젖 밖에 먹을 수 없다는 당연한 이유 외에도) 반드시 그 예식의 의미를 이해하고 먹도록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출애굽기 12:27에 기록되었다. (우리 말 번역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영어 번역을 보면 “부모님께서 이 예식을 행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What do you mean by this service?” 라고 아이들이 묻는다. 그래서, 의미를 잘 모르는 아이들은 예전을 옆에서 관찰할 뿐 예전 음식을 먹지는 않았다고까지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5. 성례전이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한다는 표(sign)로서는 성례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 언약의 실질적 내용이 그 사람에게 분명하게 이루어진다는 ‘보증’ 곧 인(seal)으로서는 그 언약을 참으로 믿는 자들에게만 효과를 갖는다.

5.1. 대표적인 예가 이삭의 아들 에서이다. 그는 언약공동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당시의 성례전인 할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죽 한 그릇 보다 가벼이 여겼고, 이로 인해 그 언약이 그에게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즉 할례가 그에게는 표로서는 의미가 있었지만 인으로서는 작용하지 않았다.

6. 은혜의 언약의 결정체이자 확실하고도 영원한 보증이 되는 ‘그 아들’이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불리는 나사렛 예수이시다.

7. 그리스도께서 그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사도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마태복음 28:19)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고린도전서 11:23–25)을 시행하도록 명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의 언약공동체의 성례전이다.

8.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언약공동체에게 주셨던 성례전 곧, 할례와 유월절을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하신 것이 세례와 성찬이라는 사실이다. 성찬이 유월절 예식을 새롭게 하신 것임은 예수께서 사도들과 유월절 예식을 행하시는 자리에서 성찬 예식을 제정하셨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세례가 할례를 새롭게 하신 ‘그리스도의 할례’로서 의미를 가짐은 사도 바울의 서신, 골로새서 2:11–12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9. 그래서 세부적인 것에서는 차이가 있어도 예식을 집행하는 큰 원칙은 할례와 세례, 그리고 유월절과 성찬 예식 사이에 연계된다. 무엇보다도 이들 예식들은 모두 동일한 언약 곧,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에 대한 표와 인이 된다 (위의 1 참조).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의미를 알고 참여하도록 하나님께서 명하셨던 것 처럼 (위의 4.2.1 참조),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의미를 분별하고 참여할 것을 사도들은 요구했다 (고린도전서 11:27–19). 할례의 경우 공동체에 들어오는 집안 모든 사람들이 적용 대상이 되었듯이 (위의 4.2.1 참조), 세례 역시 집안 단위로 사도들이 베풀었다 (사도행전 16:33, 18:8). 유월절 예식과 성찬 모두 언약을 새롭게 (renew) 하는 예식으로써 각 사람이 여러번 참여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할례와 세례는 언약공동체에 들어왔다는 입문 (entrance) 예식으로써 각 사람에게 한 번만 시행한다.

몇 가지 질문

질문 1: 세례는 반드시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답: 아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마술사 시몬이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지만 (사도행전 8:13) 나중에 그에게 참 믿음 곧, 구원의 신앙이 없었음이 드러났다 (사도행전 8:22). 그러므로 세례를 구원 받았다는 증거로 혹은, 반드시 구원의 신앙이 있다는 증거로 사용하도록 제정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누군가가 하는 말을 듣고 그가 진정으로 구원 받았는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알아보라고 명하시지도 않았다.

질문 2: 세례가 반드시 구원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라면, 세례의 목적은 무엇인가?

답: 언약공동체로 들어왔음을 알리는 예식 곧, 입문의 (entrance) 예식이다.

질문 3: 믿음을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닌가?

답: 이 질문은 ‘누구를 언약공동체의 일원으로 볼 것인가’이다. 일단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어떠했는지 보자: (1) 태어날 때는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아니었을지라도 나중에라도 자기가 언약을 지키는 백성이 되고 싶어한다면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룻이다 (룻기 1:15–16). (2) 태어나기를 언약공동체에서 남으로써 자연스럽게 언약의 백성이 된다; 대다수의 언약의 백성들이 그랬다. (3) 앞서 두 가지 방식을 통해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자기가 언약을 져버린다면 공동체에서 떠난 것으로 여긴다; 대표적인 예가 에서이다 (히브리서 12:16). 물론 구약의 원칙을 신약에 적용해도 되느냐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신/구약의 구분은 언약의 성취자가 ‘오실 것이다’ 혹은 ‘이미 오셨다’는 시기적 차이일 뿐,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사도들은 구약공동체의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적용시킨다; 예를 들어 사도 베드로는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사도행전 2:39)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신명기 29:10–15의 관점과 일치한다 (특히 신명기 29:15에 유의하라).

질문4: 아기들은 믿음이 없으니 세례를 줄 수 없는 것 아닌가?

답: 믿는 자의 자녀들이 믿음이 없다고 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세례 요한과 (누가복음 1:15) 삼손은 (사사기 16:17) 태중에서 구별된 사람들이다. 오히려 성경은 믿는 자의 자녀를 (에서 처럼 나중에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한)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여길 것을 가르치고 있다 (시편 22:9–10, 71:6; 이사야 44:2,24; 디모데후서 1:5). 이는 성인(成人)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앞서 질문1의 대답에서도 보았듯이 비록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진정 구원의 신앙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언약을 믿노라며 언약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자를 받아주고 그에게 세례를 베풀듯이, 하나님께서 어미의 뱃속을 통해 언약공동체로 보내신 자를 우리는 믿는 자로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바 언약공동체가 그 자녀들을 여기는 태도이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은 상충 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9–11문)

아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9–11문답:

9문: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의 율법에서 요구하신다면 이것은 부당한 일이 아닙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행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으나, 사람은 마귀의 꾐에 빠져 고의(故意)로 불순종하였고, 그 결과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도 하나님의 그러한 선물들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10문: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순종과 반역을 형벌하지 않고 지나치시겠습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 모두에 대해 심히 진노하셔서 그 죄들을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의로운 심판으로 형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고 선언하셨습니다.

11문: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하신 분이 아닙니까?
답: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분이나 동시에 의로우신 분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엄위를 거슬러 짓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이 죄에 대해 최고의 형벌, 곧 몸과 영혼에 영원한 형벌을 내릴 것을 요구합니다.

아래는 김헌수 목사님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에서 발췌:

‘하나님의 요구가 부당한가?’ 하는 문제를 지적으로만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바르게 대답하려면 ‘하나님의 의(義)’에 대하여서 잘 알아야 합니다.

이 문제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의’에 대한 이해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의’는 ‘언약의 관계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불의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겨서 불의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내신다면 문제는 더 어렵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언약을 깨뜨리고 불의하게 되었을 때에 소망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법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상황이 바뀌면 법도 바뀝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가장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상황이 바뀌어도 바뀔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려서 불의하게 되었어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지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시고, 언약을 지키는 ‘의’ 때문에 아드님을 보내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언약에 충실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를 풀어 주고 깊은 위로를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심정적으로도 하나님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어리석은 말로 반론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의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금 이 요리문답에서는 우문에 대하여 그렇게 현답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약출판사 홈페이지에 가셔서 이메일 주소를 등록하시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매 주 마다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김헌수 목사님의 요리문답 강해도 부분적으로 발송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3문: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Quote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3문답:

질문: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의 죄와 비참함을 압니다.

아래는 김헌수 목사님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에서 발췌:

‘조용한 밤에 자기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혹은 ‘자기의 양심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경험이나 양심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율법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인생의 경험과 양심으로 비참함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판단을 내리는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판단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판단합니다. 자기는 잘못을 인정하지만 다른 사람이 하지 않으면 자기의 도덕적 우위를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을 낮춥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양심을 가지고 자기를 판단하는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데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7:21-22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항목들 가운데서 좋은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은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것 가운데서 좋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와 비참함은 절대적입니다. 사람의 양심이나 경험으로는 그러한 것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율법으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3문의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아이들이라도 금방 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는 평생 동안 알아 가도 다 알 수 없을 만큼 깊습니다. 나의 죄와 비참함은 오직 하나님의 율법에서만 알 수 있습니다.

성약출판사 홈페이지에 가셔서 이메일 주소를 등록하시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매 주 마다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김헌수 목사님의 요리문답 강해도 부분적으로 발송됩니다.)

진정성이 잘못된 방법을 보완하지는 못한다

하나님께서 가납하시는 길이 아닌 다른 도리를 붙잡고 아무리 각고면려한다 해도 하나님께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고집하는 것은 완고함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큰 가르침 중 하나이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 사무엘 선지자가 전해 준 말씀이다.

이 큰 도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었다는 사람들에게는 적용 되지 않는 것일까? 그리스도를 믿노라 하는 사람의 경우, 진정성만 있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 바친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가납하시고 승인하신 방법과 길이 아니어도 하나님께서 가상히 여겨 주시느냐 말이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 마태복음 7:22에 나오는 질문의 성격과 유사하다.

내가 아는 한 성경은 이 문제에 있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다른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언제나 바른 방향과 도리를 따르는 것이 우선이다. 얼마나 희생하고, 얼마나 열심을 다 했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 시편 131:1의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