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기적을 체험한다고 믿음이 생기지 않음

그 옛날 이집트의 파라오는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뒤 다시 지팡이가 되고, 나일 강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가 온 땅을 뒤덮고, 티끌이 벌레로 변하고, 파리 때가 넘치고, 가축들이 돌림병으로 죽고, 사람과 동물들이 종기로 인해 죽고, 우박과 불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남은 곡식을 메뚜기 때가 와서 먹고, 흑암이 지면을 덮고,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들이 죽고, 홍해와 자기 군대 사이에 불구름 기둥이 막는 것을 보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별된 것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천하를 다스림을 보고도 파라오는 하나님께 절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파라오]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애굽기 9:15–16) “내가 그[파라오]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10:1–2)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로마서 9:18–23)

그 옛날 파라오 만이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고,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도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 (마태복음 28:17)

그래서 신비한 체험을 기독교에서는 그리 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다. 신약 교회 초기에 하나님께서 교회에 꼭 있어야 하겠다 하셔서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사람은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던 자들이 아니라, 기록된 바로는, 손땀으로 교회를 섬기던 도르가 뿐이다. (사도행전 9:39)

그렇다고 우리 주위에 신비한 일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은 매일 우리 눈 앞에 있다. 또 인류의 역사는 변치 않는 증거로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8–11)

매일 온 우주가 질서 정연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도 그런 법칙을 자연 위에 펼치는 권능이 있음을 부인하고 그렇게 자연을 제어하는 권능 없이 물리 법칙이 자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갖고 있는 그 미신을 빨리 버리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고도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가 있다면 빨리 그 미신을 버리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중보기도’는 부적절, ‘도고’라 해야

‘중보기도’라는 말이 한국 교회에서 많이 쓰이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는 (디모데전서 2:5) 진리를 놓고 생각한다면 부적절한 표현이다. 사람들 입에 익지 않았겠지만 ‘도고(禱告)’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개역성경에서 디모데전서 2:1을 번역할 때 사용한 말.)

로마서 15:30을 보면 바울 사도가 로마의 성도들에게 도고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더 도고의 유익을 기대해야 하겠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도고를 요청한 것을 읽고 우리도 천당에 가 있는 바울에게 도고를 요청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Whitby는 ‘바울이 편지를 통해 도고를 요청한 것을 잊지 말라. 그러니 바울을 본받아 그에게 도고를 요청하고 싶다면 바울한테 편지를 쓰라’고 대답한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말씀을 아뢰는 방도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와 기도라는 방도를 통해 교통할 수 있다고 성경 그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한 시도는 우상 숭배이다.

물론 우리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래서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손에 우리의 기도를 맡겨야 한다. (이것은 기도 뿐만이 아니라 예배, 헌상, 찬송 등 모든 것이 그렇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골로새서 3:17)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새벽에 하던, 밤에 하던, 영어로 하던, 국어로 하던 상관이 없는 것이다 — 기도는 다 예수님의 손에 맡겨야 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공효 외에 그 무엇으로도 기도를 하나님께서 더 기쁘게 받으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언 1:26–30 “…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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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26–30) 하나님께서 언제까지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음이 반복 되면 어느 시점 이후로는 돌이키는 것이 불가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그 옛날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파라오와 그 신하들이다. 재앙을 만나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거역한 그들을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불순종 가운데 내버려두셨고, 그 결과 거듭되는 재앙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작용하기 보다는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자기를 만드신 자로부터 버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생각할 일이다.

로마서 15: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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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5:6) 부부간에 가장 명심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배우자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그렇게 씻기신 하나님께서는 “흠 없이” 여기사 받으셨다. 그러니 내가 감히 비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의 못된 욕심과 육신은 끊임 없이 비난의 대상을 찾는다. 비난하기 전에 자신이 비난할 위치에 있는지 먼저 살핌이 정당함을 왜 자꾸 잊는지 모르겠다.

로마서 15:6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로마서 15:6]

여기에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큰 이유가 나타나 있다; 기독교는 그 최종 목표를 막연하게 신적인 존재에 다가가거나, 깨달음을 얻거나, 혹은 만물을 신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이고 분명한 대상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는 데에 두기 때문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경배하기 싫어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기록된 문서를 보면 수 천 년 전 이집트의 파라오도 자기 수하에 있던 히브리 종들을 놓아줄 것을 이스라엘의 신(神)께서 명하신다는 모세의 말을 전해 듣고도 무릎 꿇기를 거절하였다. 파라오와 그 신하들은 야훼께서 행하시는 기사를 보고 거기서 신적인 권능을 보았지만 히브리 종들의 신(神)이 자기 머리 위에도 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마술사들이 파라오에게 “이것은 직접 신이 하는 일입니다.” 하고 말했으나, 파라오의 마음은 굳어져서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출애굽기 18장 中 (공동번역)]

‘이것은 직접 신이 하는 일’이라 했다 해서 마술사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한 것처럼 생각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재앙을 겪는 이유가 모세와 아론이 전한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끝까지 시인하지 않는, 다시 말해, 신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것이 히브리인의 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부인하는 반동을 읽을 수 있다.

모세와 아론을 보내셨던 하나님은 이 끝의 날들에 자기 친 아드님 곧, 나사렛 예수를 보내셨다. 그 아드님의 말씀은 기록되어 분명히 우리에게 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1:27]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5:23--25]

모세와 아론 보다 더 큰 이께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발자국을 남기시고 분명한 말씀을 그의 백성들에게 맡기셨다. ‘모든 종교는 같다’, ‘모든 종교는 결국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는 식의 반응은 그 옛날 파라오와 신하들의 반응과 다름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아버지께 절하는 것 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