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의 실천적 반증

전에 올린 글에서는 종교다원주의의 가르침이 왜 기독교에 잘 적용이 되지 않는지 간단히 적었다. 여기서는 종교다원주의가 왜 잘못되었는지 실천적인 면을 언급하고자 한다.

사람이 지니는 신념은 인격의 일부를 이루고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를 이룬다.

한 사회도 그 주도적인 사상에 의해 만들어 내는 역사가 달라진다. 칼빈주의, 로마 가톨릭, 이슬람, 불교가 번성했던 각 사회와 그 역사를 보면 이 사상들이 뚜렷하게 구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실천이 이론의 진실됨과 신빙성을 실증한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은 일리가 있다.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성경도 실천이 믿음의 질을을 실증한다고 말한다. 믿음이 있는데도 실천이 못 따라 주어서 구원을 못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변화가 없는 것은 애초에 구원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각 사상이 이루어내는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어디에 진실이 담겨 있는지 살필 수 있다. 물론 그런 것을 알아볼 식견이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적어도 성경은 역사적 진실 위에 서 있는 믿음을 요구한다: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신명기 18장 中)

진실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낸 신화를 믿는 사람의 무능력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실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시편 115편 中)

하나님 나라와 자유주의 신학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기독교는 언제 그만 둘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기독교에 대한 질문이니,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이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에 대해 가르치느 것 중 몇 가지 기초적인 것을 먼저 상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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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 3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한1서 3장 中)

이와 관련한 설교 두 편을 추천해 드립니다. 지난 주일 아침과 저녁에 전달 된 강설입니다.

아래는 요한1서 3:2–3에 대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말:

I suppose we must agree that nothing more sublime than this has ever been written, and any man who has to preach upon such a text or upon such a word must be unusually conscious of his own smallness and inadequacy and unworthiness. One’s tendency with a statement like this always is just to stand in wonder and amazement at it. I have never chosen, in and of myself, to preach upon this text. I have often felt that I would like to, but there are certain great words like this in Scripture of which frankly I am, in a sense, frightened; frightened as a preacher, lest anything that I say may detract from them or may rob anyone of their greatness and their glory. That may be wrong, but this is how it always affects me… (Dr. Martyn-Lloyd Jones)

우리 모두는 이것이 사람이 적은 것 중 가장 고상한 것이라는 것과, 이 말씀이나 거기에 있는 단어를 놓고 강설을 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시시함과 부적합함 그리고 하찮음을 유난히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데에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진술 앞에서는 사람은 그저 경의와 놀라움에 서 있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놓고 강설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강설해봤으면 좋겠다고 느낀적은 있지만, 성경에 있는 이런 숭고한 말씀에 대해서 솔직히 어떤 면으로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설교자로서의 저의 말들이 그 말씀의 위대함과 영광에 혹여나 감손이나 훼손을 가하지 않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항상 그런 감정에 둘러쌓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박사)

성화 2

성화와 관련한 앞선 글에서, 성화는 도덕적으로 고결해지려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 사람의 능력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로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깨닫고,
  • 그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바꾸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예정이 있었기 때문임을 앎으로써,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대하여 ‘뜻하신 것을 이루시옵소서’ 아뢰는 믿음의 순종이 성화의 길이라고 적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나는 돌부처 처럼 가만히 있어도 되겠네’ 혹 질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맨 처음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입은 사람에게 새 생명이 활동하도록 하시는 것이니, 그 사람은 결코 꼼짝 않고 있을 수 없다. ‘생명’은 그 말의 정의상 정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 시편 115편 中

위의 말씀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못한 자들의 모습일찐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은 자들의 상태는 그 반대임을 말해서 무엇하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나는 돌부터 처럼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불을 붙이셨으니 나는 타오르지 않아도 되겠네’라고 말하는 식의 말장난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불이 심령에 옮겨붙은 자들은 타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엄마가 가는 곳에 따라가지 않으려는 아기 없듯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영광의 길로 이끌고 가시는데 나는 가만히 있겠다고 생각할 主의 자식 없다. (참고로 이번 주 강설은 이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오히려 우리가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것은 우리를 영광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택정에 대한 생각이 무뎌질 때이다; 복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희미해질 때이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성화 역시 믿음의 열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성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로마서 6장 中)

위의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성화가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죄값을 치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만세 전에 예정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그 안에서 택하신 이유는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이 또한 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울의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분리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화를 분리할 수 없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성화의 길을 걷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화는 ‘구원 받은 것이 감사하니 이제라도 힘을 내서 열심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자’는 식의 반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밀고 가시는 영광의 길에 대해 ‘아멘’으로, ‘예, 과연 그것이 제가 마땅히 가야할 길입니다, 저를 주장하소서’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행보이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죄에 대하여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다고 여겨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 ‘여길지어다’라고 번역된 번역된 λογίζομαι는 ‘그런 줄로 대충 여기고 살으라’는 말이 아니라, 사실을 분명히 알고 거기에 의거해 모든 것을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죄값을 치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듯이, 그의 죽으심과 부활이 또한 나를 죄의 주권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향해 걷게하신다는 것을 또한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그 길로 하나님께서 밀고 가고시기 때문에 나의 지체를 그 분의 뜻에 따라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호세아 14장 8절)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활용하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과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설교를 듣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싶어 모인 신자들에게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사도행전 13:43)

우리의 힘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의 손길 안에 거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신자들에게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갈라디아서 5:16)

위의 사도행전 말씀과 갈라디아서 말씀을 ESV는 다음과 같이 각각 번역했다: “continue in the grace of God”, “walk by the Spirit” — 두 말씀 모두 우리의 신자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갚아보겠다는 어쭙잖은 생각을 품기 보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그 은혜를 우리에게서 나타내기를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겸허히 순종하는 생활임을 보이고 있음이리라. 이와 관련하여 김홍전 박사의 다음 말이 생각난다:

그런 까닭에 ‘내가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꼭 붙들고 있다’ 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늘 붙들고 계신 그 품안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 그 품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걸어가고 내가 붙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유리(遊離)된 채로 내가 하나님을 붙들려고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내가 어떻게든지 하나님 앞에 잘 믿는 사람이 되겠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늘 하나님의 자식답게 나타내시는 위치 가운데 떠나지 않고 있어야 합니다.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하고 거룩한 것을 자부심(pride)으로 알고 있을 때는 벌써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대단하게 여기고 스스로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 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할 때는 타락하는 것입니다. (김홍전,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제 7강, p.224)

그러므로 신자가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의사를 무시한 것 — 그 분의 뜻을 나타내시는 데에 자신을 머물지 않고 자기의 의사대로 행해 보겠다고 나선 것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