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로마서 6장 中)
위의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성화가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죄값을 치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만세 전에 예정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그 안에서 택하신 이유는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이 또한 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울의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분리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화를 분리할 수 없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성화의 길을 걷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화는 ‘구원 받은 것이 감사하니 이제라도 힘을 내서 열심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자’는 식의 반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밀고 가시는 영광의 길에 대해 ‘아멘’으로, ‘예, 과연 그것이 제가 마땅히 가야할 길입니다, 저를 주장하소서’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행보이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죄에 대하여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다고 여겨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 ‘여길지어다’라고 번역된 번역된 λογίζομαι는 ‘그런 줄로 대충 여기고 살으라’는 말이 아니라, 사실을 분명히 알고 거기에 의거해 모든 것을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죄값을 치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듯이, 그의 죽으심과 부활이 또한 나를 죄의 주권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향해 걷게하신다는 것을 또한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그 길로 하나님께서 밀고 가고시기 때문에 나의 지체를 그 분의 뜻에 따라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호세아 14장 8절)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활용하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과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설교를 듣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싶어 모인 신자들에게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사도행전 13:43)
우리의 힘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의 손길 안에 거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신자들에게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갈라디아서 5:16)
위의 사도행전 말씀과 갈라디아서 말씀을 ESV는 다음과 같이 각각 번역했다: “continue in the grace of God”, “walk by the Spirit” — 두 말씀 모두 우리의 신자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갚아보겠다는 어쭙잖은 생각을 품기 보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그 은혜를 우리에게서 나타내기를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겸허히 순종하는 생활임을 보이고 있음이리라. 이와 관련하여 김홍전 박사의 다음 말이 생각난다:
그런 까닭에 ‘내가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꼭 붙들고 있다’ 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늘 붙들고 계신 그 품안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 그 품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걸어가고 내가 붙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유리(遊離)된 채로 내가 하나님을 붙들려고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내가 어떻게든지 하나님 앞에 잘 믿는 사람이 되겠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늘 하나님의 자식답게 나타내시는 위치 가운데 떠나지 않고 있어야 합니다.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하고 거룩한 것을 자부심(pride)으로 알고 있을 때는 벌써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대단하게 여기고 스스로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 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할 때는 타락하는 것입니다. (김홍전,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제 7강, p.224)
그러므로 신자가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의사를 무시한 것 — 그 분의 뜻을 나타내시는 데에 자신을 머물지 않고 자기의 의사대로 행해 보겠다고 나선 것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