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입법자로서의 권세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7장에 걸쳐 산상보훈을 제자들에게 베푸시니 제자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했다. 그들이 느낀 그 권세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권세를 느낀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의 첫 부분 부터 율법의 참 의미에 대해 설명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 설명 방식은 단순히 율법 조항의 의미를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그 조항이 반영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법(lex aeterna)을 선포하셨다 — 예를 들어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심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조항은 ‘마음에 음욕을 품지 말라’는 원칙의 실정법이었다는 사실을 가르치심과 함께 “음욕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영원법을 선포하셨다 — 그리고 그 법을 선언하는 방식은 하나님께 의지하여 법령을 선포하였던 모세와는 달리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고 하심으로 친히 그 분 자신에게 그 권위를 두셨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 그 분이 하나님 나라의 입법자이심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 그 분 외에 누가 하나님 나라의 법을 제정한단 말인가?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초연한 권위를 보이셨다.

 

몇 가지 추가적으로 느낀 것:

 

▶ 간혹 율법과 복음이 상극인 것 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러나 복음과 율법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고,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 서로 상충될 수는 없다. 물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사람의 의지”와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서로 상극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율법과 복음은 서로 대척적인 관계에 있다’는 명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가 율법과 전혀 상관 없다는 태도는 분명 비성경적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약의 가르침은 모세가 전하여 준 율법과 독립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율법의 참 의미는 모세가 전하여 준 율법보다 훨씬 지키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모세는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 조차 품지 말라 하셨다; 모세는 살인하지 말라 하였으나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해서도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산상보훈에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법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 불가능한 것 이상으로 사람의 의지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 우리가 또한 분명히 보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대강령은 모세가 전하여 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마음의 음욕을 품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간음하지 아니한다. 형제를 미워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살인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즉 완전한 것이 오면 어린 아이의 것은 버리는 것이다. 왜냐면 완전한 것 안에 어린 아이의 것은 이미 들어 있기 때문이다.

 

▶ 여기에 율법이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가 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아니하셨지만 성령님께서 교회를 이끄시며 율법이 반영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법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말할 때 바울이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은 구약 성경임에 틀림 없다.

 

▶ 그러므로 우리는 계율주의도 부인하지만 마치 신약에는 법이 없는 것 처럼 얘기하는 무법주의 역시 경계한다. 천지의 대권을 갖고 왕좌에 오르신 예수님은 그분의 법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

 

UCC — 동성간 결혼 지지

미국에서 가장 큰 교단 중 하나인 United Church of Christ [UCC]는 그저께 동성간 결혼을 지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교단은 이미 70년대에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개교회에는 구속력은 없지만 이 교단에 속한 많은 교인들은 자신들이 내는 헌금이 이러한 교단을 지원하는데 사용된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끼고 있다, UCC는 개교회들이 동성간 혼인을 축복해줄 것과 동성 혼인 승인을 위한 입법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중에 한 교직자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도 신령한 (spiritual) 사람들이다”고 말했다.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 이러한 교회들이 늘 하는 말이 동성애자들을 미워해서는 아니된다고 말한다. 개신교도들 중에 공공연하?동성연애자들을 미워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은 개신교도가 아닌 일반 사람들 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독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동성애자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왜냐면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께 영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며 그리스도는 그러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물론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따라서 교회는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 있으면 그들이 우상숭배를 안 하도록 요구하며, 마찬가지로 동성애를 하던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1)

▶ 또한 자주 듣는 얘기가 예수님은 동성애자들을 정죄하지 않으셨다는 얘기다. 그러나 주님은 “율법의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룬다”고 하셨다. 물론 하나님의 율법은 동성애를 금한다. 게다가 ‘정죄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너에게 죄책을 씌우지 않겠다’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그 죄책을 대신 받으시겠다는 뜻이지 ‘너는 죄를 안 지었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요 12:47-48)

▶ 또 자주 듣는 얘기가 성경은 옛날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먼저 얘기한 것도 아니고 세상이 주장하던 것을 교회가 뒤늦게 따라가기 시작한 사상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은 전 인류가 아담 안에서 모두 죄악에 빠졌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 왜냐면 진화론에 의하면 인류는 지구 위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전 인류가 한 여자와 한 남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리저리 세상 좇아가기 바쁜 교회들은 이제 뭐라 할 것인가.

▶ 위에서 언급한 UCC의 교직자가 생각하는 “신령한 사람”(spiritual person, 고전 3:1)은 사도 바울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바울 서신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동성애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UCC와 사도 바울은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UCC는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아무리 자기네 교단 이름을 “Church of Christ”라고 해도 말이다.

▶ 예수님의 교회라고 표방하는 교회 들 중 한 쪽에서는 동성애를 역리(逆理)로 규정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혼인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로 고백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사람이 만들어 낸 제도로 규정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성경의 특수 계시를 고백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앞선 시대 사람들의 신앙 고백으로 여긴다. 사람들이야 자기가 원하는대로 믿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은 그것이 사람들이 묶은 것이든 아니든 하나의 통일된 신학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방금 얘기한 양 쪽 중에 후자는 우리가 전해 받은 성경의 그 통일된 주제와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배도(背道)다. 이것이 내가 주위의 한인 교회를 처음 출석하다가 교회를 옮긴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다. 그 교회는 UCC에 가입되어 있었다.

 

하나님께로 난 믿음

마라톤 맨 님의 블로그에 은혜의 방도로서의 믿음을 지적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 일부분이 올라와 있다.

“the faith that was once for all delivered to the saints” (유다서 1:3)의 말씀이 가르치듯이 믿음 역시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지, 성도가 발휘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 이야기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마련하셨고 사람이 믿음으로 그것을 얻어낸 것이 아니라 믿음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은혜가 은혜인 것이다 — 즉 인간에게서 아무 조건을 찾지 않으시고 “선물” 처럼 주신 것이다. 우리가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고 그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실증된다. “For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And this is not your own doing; it is the gift of God,” (엡 2:8)

앞 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의 생활이란 자기의 그 무엇을 조금이라도 동원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단상을 적었었는데, 신자의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 노력의 합력이라고 이해하고 그런 종교 생활을 추구하는 많은 경우에 그 원인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는 복음 자체를 그런 방식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는 말씀이 가르치듯이 우리의 구원이 처음부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을 위해 자기의 그 무엇을 동원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의 유아

전적으로 주만 의지한다는 참된 경건이 아닌 인간과 신의 합작이라는 세속 경건이 교회에도 들어와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깝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고 하셨다. 오직 성신님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셨으니 여기엔 사람의 그 무엇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사람의 전적인 무능력은 극명한 것이다. 또한 참 경건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계시다.

 

이 진리가 우리를 지배하지 아니할 때 교회는 종교 단체로 전락하는 것이다. 모여서 사회 운동도 하고 봉사도 하고 구제도 하고 교제도 하고 즐거움도 있고 기도와 말씀을 읽는 가운데 마음의 위로도 얻고 주위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만 경건의 모든 모양새는 갖추었으나 시대의 사명을 감당할 능력도, 지혜도 없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배도의 탁류가 몰려와도 뭐가 뭔지 구분할 혜안이 없는 것이다. 이런 저회 상태 가운데 빠지지 않기를 주님을 의지해 바래본다.

 

중생자의 생활

하나님의 자녀가 장성하는 자태는 말씀이 들어가면 성신님이 그 말씀을 쓰셔서 그에게 힘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각오와 각성이 있게 하셔서 그가 ‘아,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나는 이렇게 하려 해도 그 일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고,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네 힘으로도 못하고 능력으로도 못하고 오직 성신으로만 하는 것이다”(슥 4:6) 하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신을 좇아 행하라”(갈 5:16). 성신님을 의지하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대로 내가 “아니요” 하고 반대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령하고 거룩한 자태와 하나님 자식다운 자태를 생활 가운데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종교나 혹은 세상의 도덕이 하라고 하는 것을 그대로 준행해서 이루어 놓은 자태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도덕에서는 “너는 열심을 내라, 부지런해라, 마음을 고정해라,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교훈할 때, 사람은 그 교훈대로 수양하고 노력해서 상당히 그런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차츰차츰 그런 덕이 많이 쌓여지면 도덕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도리도 그런 식으로 하나씩 쌓아올릴 수 있느냐 할 때, 쌓아올려서 만들어 보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중생의 도리를 잘못 깨닫고 성경이 가르치는 여러 교훈을 잘 지키라, 죄를 함부로 짓지 말라, 부지런히 하라, 열심으로 교회를 섬기라, 남에게 신실하라, 친절하라, 마음을 항상 고정하라, 이런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면 ‘아, 그래야겠다’ 하고 하나하나를 노력해서 해 보려고 하기는 합니다. 마치 세상 사람이 어떤 도덕적 교훈을 노력하여 실천해 보려는 것과 같이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다운 모양을, 그런 인격적인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으나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사람의 자연스러운 장성의 자태가 아님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사람의 자연스러운 장성의 자태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느껴야 하는 것이고, 하라고 말씀하시는 일들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부지런하라” 해서 내가 가진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을 가지고 부지런히 산다든지, “정직하라” 해서 내가 가진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으로 정직히 행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경지, 그 순결, 그 부지런을 원하십니다. 사람의 열정을 가지고, 사람의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사람의 혈육에서 나온 어떠한 덕과 어떠한 훌륭한 능력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혈육은 능히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느니라” (고전 15:50).

그런고로 사람의 혈육에 의한, 즉 사람의 힘에 의한 사람의 생명의 활동에 의한 도덕의 건설로는 참으로 하나님 나라다운, 거룩한 그 아드님의 나라의 생활을 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할 때, 성경에 가르친 “무엇을 하라”는 여러 가지 조건은 중생한 사람이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장성하면서 차츰차츰 나타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방법은 말씀을 배워서 말씀의 뜻을 깨닫고, 성신을 의지함으로 성신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서 이루어 나가십니다 (롬 8:1-4,8; 갈 5:16-17). 이것이 깨닫는다는 말인데, 그때그때 문제에 임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깨닫고 그것을 자기 힘으로 하지 않고 성신님을 의지하여 그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중략]

이렇게 해서 주님만을 전부로 삼고, 의지하고 나가는 이것을 신앙이라, 믿음이라 하는 말로 표시합니다. 믿음이란 말뜻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주님만 부여잡고, 자기는 전적으로 무능한 것을 알고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 김홍전, <중생자의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