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 설교

사도행전 13장 16절에서 41절에는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 중에서는 이것이 바울의 첫 설교입니다. 누가가 압축력 있고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 설교에, 사도 바울의 신학적 사상과 성경을 보는 관점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김홍전 박사의 설교집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 설교를 곰곰이 풀어가며 읽어보면 거기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대권이 면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문장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건져내셨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대로 예수를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다…’

즉, 바울의 사상에는 철두철미하게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나타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정부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중요한 역사적 현실로 바울의 역사관에 서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라는 종교 생활을 선포하려고 거기 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종교라고 하는 인간 생활의 일부분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와 관련된 문제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디옥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청했습니다 — 바울이 제시하는 논제가 우리 존재의 목적과 관련된 것임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 했기 때문에 그의 설교의 시작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신 이야기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반역하였던가, 그리고 거기에 대해 하나님의 엄위는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사울 왕의 사건을 대표적으로 들어서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하나님의 엄위를 이야기 한 것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대권의 면모 곧, 그의 그의 구속의 은혜가 어떻게 조화롭게 그 통치 가운데서 나타나는가를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이스라엘의 소행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참으사 그들에게 사사를 주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던가; 그들이 하나님을 잊고 왕을 찾았고 세우신 사울이 하나님께 불순종 했지만 그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은 구주를 보내실 약속을 하셨던가; 약속대로 보내신 메시아 곧 예수를 사람들이 정죄하여 죽였으나 어떻게 하나님은 그의 죽음을 통해 죄를 속하셨던가; 또한 예수를 다시 살리시사 그를 힘입어 죄 사함을 얻는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홍전 박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엄위와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는 언제든지 조화되어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사상상으로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하신 통치의 대권에 나타나는 공의와 하나님의 은혜에 나타나는 사랑이 하나의 조화 있는 것으로 나타나서 거룩한 나라를 땅 위에 건설하시고 그 위에서 속죄의 은혜와 통치하시는 그 거룩하신 역사(役事)가 동시에 움직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김홍전,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제 5강, p.166)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정점을 이루고 그를 통해 구현 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중요한 메세지였습니다.

그랬을 때 우리의 정당한 반응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것이 바울의 결론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김홍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확실히 서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고, 그와 동시에 교만이나 신앙의 자만 가운데 빠져서는 안됩니다. 좀 더 고행을 하고 좀 더 자기를 단속한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야 말로 내 편이다’ 하는 이상한 교(敎) 가운데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꼭 붙들고 있다’ 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늘 붙들고 계신 그 품안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 그 품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걸어가고 내가 붙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유리(遊離)된 채로 내가 하나님을 붙들려고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내가 어떻게든지 하나님 앞에 잘 믿는 사람이 되겠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늘 하나님의 자식답게 나타내시는 위치 가운데 떠나지 않고 있어야 합니다.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하고 거룩한 것을 자부심(pride)으로 알고 있을 때는 벌써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대단하게 여기고 스스로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 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할 때는 타락하는 것입니다. (김홍전,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제 7강, p.224)

며칠 전에 제가 칼빈의 주석과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이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 설교를 공부하고 로마서를 다시 보니, 과연 위에서 언급한 사도 바울의 사상과 신학과 역사관이 로마서에 절절이 묻어나고 있었고 또 심오하게 논술되어 있음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메세지에 대해 누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도리는 쳬계적이고 또 논리적으로도 우수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바울이 전한 메세지는 참으로 기초적인 것이고 우리의 사상, 신학, 역사관 등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각의 기본으로서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그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면모에 대해 김홍전 박사는 그의 사도행전 강해에서 훌륭히 서술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제 5, 6, 7 강은 누구에게든지 꼭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만이 세상을 이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요한1서 5:5)

이에 반해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라고 사도는 말했습니다 (요한1서 5:19). 여기서 “처했다”고 번역한 ‘κεῖμαι’는 “누워 있다”는 뜻으로 어린 아기가 엄마 품에 누워 있는 것을 그릴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세상은 벗어나기는 커녕 그 악한 자 곧, 사단의 품에 안기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골로새서 1:13). 이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 김홍전 박사는 이 말씀을 언급하면서 여기에 ‘법적인 자권(子權)”과 “도덕적 자권”이 모두 나타나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제 6강)

무엇을 받을 수 있고 상속할 수 있는 위치라는 것은 법적인 자권에서 받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그의 혈맥으로 낳으셨으니까 받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성경이 기록되었을 당시의 로마 사람들의 법대로는 자식이 태어났더라도 법적으로 자식이라는 신임이 있을 때까지는 자기 집에 있는 종들의 수하에 둡니다. 종들 가운데 훌륭한 선생도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에게 맡겨서 교육하도록 두는 것입니다.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다’ (갈 4:1) 하는 신약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일정한 나이가 된 후에는 성인식을 행한다고 토가(toga)를 입히고 가락지를 끼웠는데 이 가락지라는 것이 ‘이제 너는 내 자식으로서 네가 이 집의 둘째 주인이다’ 하는 확실한 징표요 도장입니다. 가락지를 딱 끼면 그다음부터는 권위를 가집니다. 무엇을 할 때 증서를 쓰거나 명령서를 쓰고 거기에 도장을 찍으면 지금까지 자기를 가르치던 선생도 ‘예, 주인님’ 하고 복종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런 식을 거행할 때는 자기 친지를 다 모으고 증참(證參)할 사람들을 많이 모아서 잔치를 베푼 다음에 ‘이 사람이 내 자식이다’ 하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이 법적인 자권의 승인인데 칭의라는 것은 법적인 자권을 승인하는 하나의 예식입니다. 하나님이 천군 천사와 천지 만물과 모든 것 앞에서 ‘저 사람은 내 자식이다. 그런 줄 알아라’ 하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내 자식에 대해서는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고, 만일의 경우에 내 자식의 권위에 저항할 때는 나에게 저항한 것인 줄 알아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권위를 주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김홍전,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제 6강)

세상과 정욕과 싸움에서 게을렀던 저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큰 권세를 가벼이 여기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분명 복음에 대한 믿음이 약할 때 그런 태도에 묻혀버릴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큰 권세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통치, 그 정부, 곧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시기 위해서이지, 기독교라는 종교 하나를 세상에 내시려 함이 궁극적 목적 아님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고, 특히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사도행전 13장 16-41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홍전 목사는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제 7강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써 보겠습니다.

Man Cannot Free Himself From Sin – Jeremiah 17 (추가)

Thus says the Lord: “Cursed is the man who trusts in man and makes flesh his strength, whose heart turns away from the Lord. [...] Blessed is the man who trusts in the Lord, whose trust is the Lord.” [...]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and desperately sick; who can understand it? [...] Heal me, O Lord, and I shall be healed; save me, and I shall be saved, for you are my praise.

지난 주일 예배 시간에 낭독된 말씀이다.

세상은 보통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마음이 이 우주에서 가장 추악하고 병든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 — 우리가 미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마음 속에서 그린 죄악은 얼마나 추악한가! 우리는 마음으로 훨씬 많은 죄를 짓는다. 우리의 마음 만큼 못 믿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던 타인이던,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과연 저주 받은 위치에 있는 자이다.

먹는 일에서 조차도 우리 혀에 만족스러운 것만 먹다가는 건강을 잃기 쉽다. 하물며 정신적이고 영적인 일에, 가장 믿을 수 없는 우리 마음을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가? 내 마음에 선하게 보이는 것이 다 바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결코 믿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불변하는 진리의 말씀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허나 우리에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감사할 것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요엘 2:32), 주께 나의 죄를 아뢰며 예레미아 선지자와 같이 기도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아이의 사생활’ 그리고 유태인 자녀교육

“유태인 자녀교육” — 교육에 관심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말입니다. 그에 대한 얘기를 저도 많이 들었지만, 항상 표면적인 차이를 이야기할 뿐이고, 근원적인 차이에 대해서는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믿는 저로서는 “유태인들은 성경을 중심으로 교육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 역시 표면적인 이야기이고, 도대체 성경 중심의 교육의 그 무엇이 교육적 효과를 가져오는가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근래에 EBS에서 방영한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한국인과 종종 비교 되는 유태인들의 자녀교육의 근원적 차이가 무엇인지 이해할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기에 앞서 잠시 유대 민족이 인류에 끼친 유익을 언급하겠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철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교, 철학, 윤리와 관련한 역사적인 큰 줄기 두 개가 있다면,

  • 진리는 외부에서 전해진다는 계시 문화, 그리고
  • 진리는 내면을 탐구함으로 얻어진다는 명상 문화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 문화의 주축을 이룬 것이 유대-기독교 문화입니다; 이들 문화권에서는 자연의 물리적 법칙 뿐만 아니라 논리의 법칙, 그리고 도덕법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충실히 자기 주위를 관찰하고 창조주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태도를 갖습니다.

이러한 유대-기독교 문화에 근거한 과학적 사고는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는 과학문명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 유명한 노벨상 수상자들 가운데 부모 중 한명이라도 유대인인 사람의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www.jinfo.org):

  • 화학 (31 명, 전체 중 20%, 미국인 수상자 중 28%)
  • 경제 (26 명, 전체 중 41%, 미국인 수상자 중 53%)
  • 문학 (13 명, 전체 중 12%, 미국인 수상자 중 27%)
  • 물리 (47 명, 전체 중 25%, 미국인 수상자 중 36%)
  • 의학 (53 명, 전체 중 27%, 미국인 수상자 중 40%)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 문명의 중요한 발견들이 노벨상 수상자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현대 문명은 분명히 유대-기독교 문화로 부터 많은 비익을 얻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구상 인구 중 0.25%을 차지하고 미국 인구 중 2%를 차지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위의 결과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다시 유태인 자녀교육 문제로 돌아와서, EBS에서 방영한 ‘아이의 사생활’에서 언급 된 중요한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이가 정서적으로 안정 되고 긍정적이며 건실하게 자라나는 데 면밀하게 관련 있는 두 가지가 아이의 도덕성자존감(self-esteem)입니다. 저는 ‘아이의 사생활’ 프로그램을 보고 도덕성이 아이의 태도와 학업에 그 정도로 관련이 있을 줄 미처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정직한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긍정적인 태도 및 자신감이 대체적으로 높습니다. 어쩌면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높을수록 거짓의 유혹이 와도 쉽게 타협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도덕성과 자존감이라고 하는 두 지표가 아이의 성장과 교육에 미치는 영향이 그토록 큰 것이라면, 우리는 유대-기독교 교육 곧 성경적인 교육의 특징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습니다:

  1.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7) 하나님을 전부로 의지한다는 것이 교육의 기초이자 총체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식과 지혜는 오랜 명상을 통해 자기가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것을 의지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2.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잠언 1:23-26)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계시하신 것을 기록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내신 도덕법이 있다는 것과, 인류는 그 법을 날마다 어기는 죄인이라는 것과,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 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가 보던 안 보던, 모든 것을 보시고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3.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2:6, 15) 죄로 인한 타락은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오염 시켰기 때문에, 그것이 아직 분명하게 눈에 띠지 않는다고 해서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놓아둘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가르치며 권징을 해야 합니다.
  4.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부모는 결코 아이를 조작할 수 없으므로,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아이를 양육해야 합니다.
  5.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1서 4:10) 우리가 하나님을 법을 지키려 하고 또한 가르치려 함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그의 그리스도를 보내사 그 분의 나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이유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해 세우신 영원한 언약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교육 또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름

Wolfius에 의하면 히브리 사회에서 종은 자기 주인을 “아빠”(אבא)라고 혹은 주모를 “아이마”(אימא)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 8:16)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