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시대의 앵무새가 되지 않으려면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서는 세대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이미 시작된 한국 사회의 변화가 향후 한국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이다. 교회가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상당한 경우 교회는 사회의 앵무새 노릇을 해왔다. 엘룰(Ellul)의 말을 빌린다:

과거에 교회가 빈곤층을 무시했다면, 지금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이민 노동자들과 가까이 한다. 과거에 독재 정권을 뒷받침했다면, 지금은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과거에 절대적 진리와 교리를 주장했다면, 지금은 사람들이 자기가 믿고 싶은대로 믿도록 둔다. 과거에 엄격하고 잔인한 성(性) 도덕을 가르쳤다면, 지금은 낙태와 동성연애를 옹호한다. [...] 이것은 진보가 아니다. 교회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동시대 사회의 사고 방식을 그대로 수용했을 뿐이다. 빈곤층을 돕는다고 하지만 100년 전, 200년 전 보다 진리의 각성이 더해진 것이 아니다. 배교적 성격은 여전하다. 사회의 주류적 경향에 그대로 부응하는 것에 성육신(聖肉身) 된 진리란 없다. 여전히 전복된 기독교를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만함까지 더했으며 (현대에 와서 비로서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게 됐다는 F. Belo의 순진한 주장 처럼) 앞선 세대의 기독교인들을 비난하는 위선도 지니고 있다. — Jacques Ellul, “Subversion of Christianity”

이런 앵무새 노릇을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변치 않는 진리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의사 또한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것이 기록된 시대의 신앙고백이며, 우리는 우리 시대의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의해야 한다.

13 기적을 체험한다고 믿음이 생기지 않음

그 옛날 이집트의 파라오는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뒤 다시 지팡이가 되고, 나일 강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가 온 땅을 뒤덮고, 티끌이 벌레로 변하고, 파리 때가 넘치고, 가축들이 돌림병으로 죽고, 사람과 동물들이 종기로 인해 죽고, 우박과 불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남은 곡식을 메뚜기 때가 와서 먹고, 흑암이 지면을 덮고,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들이 죽고, 홍해와 자기 군대 사이에 불구름 기둥이 막는 것을 보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별된 것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천하를 다스림을 보고도 파라오는 하나님께 절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파라오]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애굽기 9:15–16) “내가 그[파라오]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10:1–2)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로마서 9:18–23)

그 옛날 파라오 만이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고,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도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 (마태복음 28:17)

그래서 신비한 체험을 기독교에서는 그리 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다. 신약 교회 초기에 하나님께서 교회에 꼭 있어야 하겠다 하셔서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사람은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던 자들이 아니라, 기록된 바로는, 손땀으로 교회를 섬기던 도르가 뿐이다. (사도행전 9:39)

그렇다고 우리 주위에 신비한 일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은 매일 우리 눈 앞에 있다. 또 인류의 역사는 변치 않는 증거로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8–11)

매일 온 우주가 질서 정연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도 그런 법칙을 자연 위에 펼치는 권능이 있음을 부인하고 그렇게 자연을 제어하는 권능 없이 물리 법칙이 자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갖고 있는 그 미신을 빨리 버리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고도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가 있다면 빨리 그 미신을 버리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중보기도’는 부적절, ‘도고’라 해야

‘중보기도’라는 말이 한국 교회에서 많이 쓰이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는 (디모데전서 2:5) 진리를 놓고 생각한다면 부적절한 표현이다. 사람들 입에 익지 않았겠지만 ‘도고(禱告)’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개역성경에서 디모데전서 2:1을 번역할 때 사용한 말.)

로마서 15:30을 보면 바울 사도가 로마의 성도들에게 도고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더 도고의 유익을 기대해야 하겠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도고를 요청한 것을 읽고 우리도 천당에 가 있는 바울에게 도고를 요청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Whitby는 ‘바울이 편지를 통해 도고를 요청한 것을 잊지 말라. 그러니 바울을 본받아 그에게 도고를 요청하고 싶다면 바울한테 편지를 쓰라’고 대답한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말씀을 아뢰는 방도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와 기도라는 방도를 통해 교통할 수 있다고 성경 그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한 시도는 우상 숭배이다.

물론 우리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래서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손에 우리의 기도를 맡겨야 한다. (이것은 기도 뿐만이 아니라 예배, 헌상, 찬송 등 모든 것이 그렇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골로새서 3:17)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새벽에 하던, 밤에 하던, 영어로 하던, 국어로 하던 상관이 없는 것이다 — 기도는 다 예수님의 손에 맡겨야 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공효 외에 그 무엇으로도 기도를 하나님께서 더 기쁘게 받으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언 1:26–30 “…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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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26–30) 하나님께서 언제까지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음이 반복 되면 어느 시점 이후로는 돌이키는 것이 불가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그 옛날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파라오와 그 신하들이다. 재앙을 만나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거역한 그들을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불순종 가운데 내버려두셨고, 그 결과 거듭되는 재앙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작용하기 보다는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자기를 만드신 자로부터 버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생각할 일이다.

로마서 15: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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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5:6) 부부간에 가장 명심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배우자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그렇게 씻기신 하나님께서는 “흠 없이” 여기사 받으셨다. 그러니 내가 감히 비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의 못된 욕심과 육신은 끊임 없이 비난의 대상을 찾는다. 비난하기 전에 자신이 비난할 위치에 있는지 먼저 살핌이 정당함을 왜 자꾸 잊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