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사회 선도 단체가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삭막한 현대 사회 속에서도 공중 도덕과 법을 잘 지키고 이웃을 돌아보며 나눔을 실천하고 근실하게 노동하며 살아가는 것은 기독교인/비기독교인 할 것 없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할 일입니다. 그런 것을 가르치기 위해 종교를 들먹일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도덕적 삶을 가르치는 것을 공교육에서 발견합니다. 건전한 사회인을 길러내기 위해 종교 단체를 조직할 필요는 없습니다. 종교와 상관 없이 사회 봉사 단체 또는 사회 정의 실현 단체 등을 조직할 수 있고 또 그런 조직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존재 의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단체든 그 단체가 성립 될 때는 고유의 목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빈민 구제 단체가 부족하거나 사회 정의를 위한 시민 단체 또는 자선 사업체가 부족해서 교회를 세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일들은 중요한 일들이고 시민이라면 관심을 가져야 할 일들임은 분명합니다만, 그것이 교회를 세운 목적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반 사회에서는 그런 구제 사업 또는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교회가 앞장 서면 참 잘하는 일이라고 칭찬을 하고 곧추세웁니다.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건 차라리 문제가 아닌 것은 어떤 단체의 비회원이 그 단체의 목적을 알아야 할 당위는 없기 때문이고, 문제는 교회 또는 교인이 교회가 왜 존재하고 자신의 의무와 권리가 무엇인지를 잘 모를 때입니다.

교회가 자신의 본질을 망각하면 세상이 ‘잘 한다, 잘 한다’ 하는 인정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게 되고 또 그러한 일에 주력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타락하게 되고 부패하게 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일체성, 그 신비한 연합(unio mystica)을 나타낼 길은 요원해집니다.

개인의 가치를 최고로 두지 않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30) 

요한복음 10장 3절을 보면 선한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양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양 하나 하나의 고유한 가치와 특성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아신 예수께서는 개인을 군중의 부품 같이 취급하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각 사람의 개성과 필요를 다 아시고 보살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나 하나와 예수님을 비교하자면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온 인류와 예수님을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창조물과도 예수님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분 앞에서는 나는 찌끼 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개인의 가치를 전체 속에 파묻어서는 안 되지만, 그 가치가 가장 높은 가치는 아닙니다. 나 한 사람 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하고 내가 부분을 이루고 있는 예수님의 몸이 지체인 나 보다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할 때에도 아드님 되신 하나님의 인격을 미물인 내가 나타내 보이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내가 성인군자가 되어 나를 보고 예수님의 어떠하심을 보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의 유기체로서 증거해 나가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 거룩한 본체 안에 있는 내가 거룩해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로새서1:16–18)

교회에 대한 우리의 빈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회학자들의 경우 교회의 등장을 어떤 사회적인 활동의 결과물처럼 이해하려고 시도하겠지만, 우리에게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설립하셔서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형태로 존재하여 왔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새로운 형태, 더 발전된 형태의 교회가 (소위 신약의 교회라고 부르는데) ‘오순절 성령 강림’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수립되었습니다.

특히 그 역사의 순간이 성경의 사도행전 2장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과연 교회를 단순한 사회적인 단체, 공동체, 친목회, 신우회와 구별시키는 독특한 성격이 무엇이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배, 선교, 사회 봉사, 친목, 교육 등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일들은 꼭 교회라는 특수한 이름을 안 붙인 단체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고 때로는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돌려 말하자면, 선교 단체를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 회사 내에서 기독교인들이 모여 신우회 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리면 그 신우회를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러한 것들에 대해 ‘거기엔 성례전 또는 권징이 시행 되지 않으니 교회라고 할 수 없다’고 답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모여 목사를 세우고 여러가지 형식을 갖추고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면 (일반 사회에서야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겠지만) 우리가 그것을 교회라고 할 수 있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교회의 본질과 생명에 대해 우리의 각성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우리의 빈곤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부패가 들어오기 쉽고 또 그러다 보면 타락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Calling

피조된 것 중에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우며 소중한 것은 교회이다.

이 세상에서 진행되는 일 중에 가장 거룩하고 아름답고 소중하며 희망적인 것은

참 교회가 뚜렷이 서 나가는 것이다.

그 분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준엄한 부르심을 느낀다.

부르신 보람을 만들어 주시고 이루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

지어낸 이야기 하나 : 어떤 청년이 천재 화가 렘브란트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 후 그 청년에게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바둑을 두는 실력이 급상승 한 것이었다. 결국 바둑 대회를 휩쓰는 수준이 되어 많은 상금을 타고 일부를 스승에게 드리곤 하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그 청년의 기력을 칭송하였고 그것이 다 “그의 스승인 렘브란트 밑에 들아간 후에 일어난 일이라”며 그의 스승을 높였다. 하지만 렘브란트에겐 그것이 찬사로 들리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기사가 아니라 화가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주님은 사회 복지 운동을 하는 사람이 부족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또 늘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이 땅에 가장 잘 그려낼 수 있는 것은 개인 개인을 통해서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라 일컬음을 받는 그 분의 교회가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영광이 된다 하는 문제를 개인의 삶의 문제로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교회의 문제로 일차적으로 생각해야 하며, 또한 예수님께 기쁨을 드리겠다는 사람 역시 어떻게 하면 주님이 인도해오신 거룩한 교회의 역사적 전진에 한 분자로서 가담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떠나서는 주님께 영광이 된다든지 기쁨을 드린다든지 따질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