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이 잘못된 방법을 보완하지는 못한다

하나님께서 가납하시는 길이 아닌 다른 도리를 붙잡고 아무리 각고면려한다 해도 하나님께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고집하는 것은 완고함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큰 가르침 중 하나이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 사무엘 선지자가 전해 준 말씀이다.

이 큰 도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었다는 사람들에게는 적용 되지 않는 것일까? 그리스도를 믿노라 하는 사람의 경우, 진정성만 있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 바친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가납하시고 승인하신 방법과 길이 아니어도 하나님께서 가상히 여겨 주시느냐 말이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 마태복음 7:22에 나오는 질문의 성격과 유사하다.

내가 아는 한 성경은 이 문제에 있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다른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언제나 바른 방향과 도리를 따르는 것이 우선이다. 얼마나 희생하고, 얼마나 열심을 다 했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 시편 131:1의 고백이다.

4대 복음이 목격자의 증언을 기록한 것이라는 놀라운 증거들

4대 복음은 신문 기사와 신화적 이야기 중 어디에 더 가까울까요? 여기에 대한 피터 윌리엄즈 교수의 훌륭한 강의입니다. (누가 한글 자막을 달면 좋겠네요.)

정경에 나타난 정확성/탁월함은 상상했던 것 이상입니다. 외경은 도무지 비교가 되질 않네요. 신화적 이야기라고 종종 공격 받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관찰 (45:17) 또한 매우 흥미롭습니다.

교회가 시대의 앵무새가 되지 않으려면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서는 세대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이미 시작된 한국 사회의 변화가 향후 한국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이다. 교회가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상당한 경우 교회는 사회의 앵무새 노릇을 해왔다. 엘룰(Ellul)의 말을 빌린다:

과거에 교회가 빈곤층을 무시했다면, 지금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이민 노동자들과 가까이 한다. 과거에 독재 정권을 뒷받침했다면, 지금은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과거에 절대적 진리와 교리를 주장했다면, 지금은 사람들이 자기가 믿고 싶은대로 믿도록 둔다. 과거에 엄격하고 잔인한 성(性) 도덕을 가르쳤다면, 지금은 낙태와 동성연애를 옹호한다. [...] 이것은 진보가 아니다. 교회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동시대 사회의 사고 방식을 그대로 수용했을 뿐이다. 빈곤층을 돕는다고 하지만 100년 전, 200년 전 보다 진리의 각성이 더해진 것이 아니다. 배교적 성격은 여전하다. 사회의 주류적 경향에 그대로 부응하는 것에 성육신(聖肉身) 된 진리란 없다. 여전히 전복된 기독교를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만함까지 더했으며 (현대에 와서 비로서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게 됐다는 F. Belo의 순진한 주장 처럼) 앞선 세대의 기독교인들을 비난하는 위선도 지니고 있다. — Jacques Ellul, “Subversion of Christianity”

이런 앵무새 노릇을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변치 않는 진리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의사 또한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것이 기록된 시대의 신앙고백이며, 우리는 우리 시대의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의해야 한다.

기독교강요 1.7절

(1년 완독 계획표가 여기 있습니다.)

1.6절에서 내린 결론—하나님의 계시의 기록, 곧 성경을 떠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음—에 의거하여, 하나님께 대한 바른 깨달음의 최종 권위가 성경에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무리들이 교회를 이루고 있고, 교회의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지, 역으로 교회가 성경에 권위를 부여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 역시 성경의 권위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에베소서 2:20)

위의 말씀에서 보듯이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전한 말씀의 터 위에 세움을 얻었다 했습니다. 누구든지 교회의 부분이 되려면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전해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스스로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최종의 권위로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해 주지 않으면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무엇이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대해 칼빈은 그것은 마치 이렇게 묻는 것과 다름 없다고 말합니다: “빛과 어둠을 구별하는 법을 누가 가르쳐 줍니까? 흰 색과 검은 색을, 단 맛과 쓴 맛을 구별하는 법을 어떻게 배우지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은 교회가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강요 1.6절

(1년 완독 계획표가 여기 있습니다.)

1.5 절에서 내린 결론에 의거하여 1.6절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계시가 필수적임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구전 되었다가 기록되었는데 그것이 성경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방식의 종교를 고안하는 유혹에 빠지는데, 거기서 벗어나는 유일의 길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편 19:7--8]

하나님께서 초기에는 유대인들에게 그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자와 그에 대한 증거가 유대인에게서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됨을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요한복음 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