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음

이번 달 초에 저희 교회에서는 사경회가 있었는데, 초청된 목사님께서 골로새서를 강설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즉 나[我]라는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일부로서 새 생명 가운데 살게하신다는 진리가 어떻게 내게 나타나는가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은 우리 가운데 계신 성신께서 그 은혜를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입혀주셔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매일 누리고 있는 것과 비슷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골고다 십자가에서 그분의 양 때들의 죄값을 대신해 받으시사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불완전한 우리는 오늘도 시시로 죄를 범하지만 성신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대속의 공효를 계속적으로 입혀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정죄받지 아니합니다.

—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하만물을 다스리시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손을 놓으시고, 세상은 그 지으신 이치대로 스스로 돌아간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실상은 지금도 우리가 그분을 힘입어 기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거하는 모든 것과 역사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권능의 팔로 다스리시며 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문제도 어느 한 시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고 곧 성신께서 항시 우리에게 덧 입혀 주시기를 바라보아야 하는 일임을 이번에 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이제부터 달라지기로 했다”는 각오를 떠올리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 날 개조시켜 쓸 수 있는 곳은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는 전부가 죽어야 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의 새 사람이 나타나야만 하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주를 향하여 눈을 들어 바라봄 밖에 없다. 구원이 주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분의 선하신 손이, 언약을 기억하시는 손길이 내게 임하길 바라봄 밖에는 없다.

주의 성신이 내게 임하셨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내가 회심했다는 것도, 내가 새로운 각오를 다짐했다는 것도, 무슨 가치를 부여할 것이 못된다. 주만 바라볼 뿐이다.

덧글: 또한 비슷하게 앞으로 어떤 큰 회오가 있어 주를 온전히 따르게 되리라는 기대를 갖는 것도 부질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의 생활은 혈과 육, 또는 의지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주께서 체득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성신께서 우리에게 의지를 불어넣어 주시지만, 그 의지(意志)를 의지(依支)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신령한 생활

마라톤 맨 님의 블로그에 일제시대 당시 조국 교회의 친일 행적을 나열한 글이 올라와 있다. 그것을 읽으며 과연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런 동일한 고난 가운데 쳐해져 있을 때 과연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일제의 만행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입에 담기도 무섭고 더러운 일들을 자행한 그것이었다. 총, 칼, 작두 등을 가지고 차마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수 없는 온갖 무자비한 짓을 저질렀다. 그런 공포와 폭력 앞에서 난 절대로 주님을 배반치 않고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할 사람이 누구랴.

나의 결론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주 기개가 높은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범인(凡人)들이야 어쩌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주의 은혜라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할 수 있으리라는 것 뿐이다.

주 예수님을 따르고 성신님의 거룩한 인도를 받아 나아가는 신령한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연관된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어느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께서 소천하시고 후임 목사를 세우는 과정에서 교회는 두 갈래로 찢어져 서로 비방하며 갈등을 빚게 되었다. 후임 목사를 선정하는 문제가 생기기 전 까지만 해도 서로 만나면 형님, 아우님 하며 서로 웃고 사랑한다고 말하던 교인들이었다. 그런데 몇 일 사이에 상대를 비방하고 편을 가르는 위치까지 떨어졌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 교회가 경건의 모양새는 번듯하였지만 참된 경건의 능력은 갖추지 못한 비참한 위치에 지금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아무런 시험과 유혹이 없을 때는 자신이 마치 성인 군자라도 된듯한 착각을 하기가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뜨거운 입김이 불어 참된 신앙을 가려내실 때, 뿌리 없는 신앙은 당장에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도덕이란 그런 것이다. 물론 사람들 중엔 훌륭한 도덕을 쌓아 올린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 조차도 하나님 나라의 덕을 선전하기에는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전부를 포기해야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神)으로 이루시겠다는 그 언약과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하겠다. 지금이야말로 혼란과 배교의 시대가 아닌가.

중생자의 생활

하나님의 자녀가 장성하는 자태는 말씀이 들어가면 성신님이 그 말씀을 쓰셔서 그에게 힘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각오와 각성이 있게 하셔서 그가 ‘아,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나는 이렇게 하려 해도 그 일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고,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네 힘으로도 못하고 능력으로도 못하고 오직 성신으로만 하는 것이다”(슥 4:6) 하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신을 좇아 행하라”(갈 5:16). 성신님을 의지하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대로 내가 “아니요” 하고 반대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령하고 거룩한 자태와 하나님 자식다운 자태를 생활 가운데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종교나 혹은 세상의 도덕이 하라고 하는 것을 그대로 준행해서 이루어 놓은 자태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도덕에서는 “너는 열심을 내라, 부지런해라, 마음을 고정해라,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교훈할 때, 사람은 그 교훈대로 수양하고 노력해서 상당히 그런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차츰차츰 그런 덕이 많이 쌓여지면 도덕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도리도 그런 식으로 하나씩 쌓아올릴 수 있느냐 할 때, 쌓아올려서 만들어 보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중생의 도리를 잘못 깨닫고 성경이 가르치는 여러 교훈을 잘 지키라, 죄를 함부로 짓지 말라, 부지런히 하라, 열심으로 교회를 섬기라, 남에게 신실하라, 친절하라, 마음을 항상 고정하라, 이런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면 ‘아, 그래야겠다’ 하고 하나하나를 노력해서 해 보려고 하기는 합니다. 마치 세상 사람이 어떤 도덕적 교훈을 노력하여 실천해 보려는 것과 같이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다운 모양을, 그런 인격적인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으나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사람의 자연스러운 장성의 자태가 아님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사람의 자연스러운 장성의 자태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느껴야 하는 것이고, 하라고 말씀하시는 일들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부지런하라” 해서 내가 가진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을 가지고 부지런히 산다든지, “정직하라” 해서 내가 가진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으로 정직히 행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경지, 그 순결, 그 부지런을 원하십니다. 사람의 열정을 가지고, 사람의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사람의 혈육에서 나온 어떠한 덕과 어떠한 훌륭한 능력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혈육은 능히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느니라” (고전 15:50).

그런고로 사람의 혈육에 의한, 즉 사람의 힘에 의한 사람의 생명의 활동에 의한 도덕의 건설로는 참으로 하나님 나라다운, 거룩한 그 아드님의 나라의 생활을 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할 때, 성경에 가르친 “무엇을 하라”는 여러 가지 조건은 중생한 사람이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장성하면서 차츰차츰 나타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방법은 말씀을 배워서 말씀의 뜻을 깨닫고, 성신을 의지함으로 성신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서 이루어 나가십니다 (롬 8:1-4,8; 갈 5:16-17). 이것이 깨닫는다는 말인데, 그때그때 문제에 임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깨닫고 그것을 자기 힘으로 하지 않고 성신님을 의지하여 그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중략]

이렇게 해서 주님만을 전부로 삼고, 의지하고 나가는 이것을 신앙이라, 믿음이라 하는 말로 표시합니다. 믿음이란 말뜻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주님만 부여잡고, 자기는 전적으로 무능한 것을 알고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 김홍전, <중생자의 생활>

하나님 나라의 도덕은 결코 개인의 완성을 추구하지 않음

여기서 우리가 중요히 생각할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에게 선하라든지 의로우라든지 진실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요컨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각고면려하고 노력해서 의나 선이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종교가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의 종교가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고,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의 종교도 정통이나 복음주의라는 이름 아래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진실하라 할 때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경계냐 하면 성경은 도달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스스로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사람의 본질적인 부패와 타락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원하는 이것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저것밖에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롬 7:19 참조) 그런고로 아무리 선미(善美)를 원할지라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얻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비록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할지라도 원하는 이것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저것만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법칙이 우리에게 있어서 그 죄의 법칙이 우리를 지배하니까 그렇다고 했습니다.(롬 7: 23-25 참조) 죄의 법칙이 있다는 걸 무시하고 사람이 스스로 고고한 경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망상과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신을 의지해서 도달해 보겠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목표가 그릇되면 안 된다는 것을 또 하나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개인이 의롭고 선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그 개인만으로는 완성되지도 않을뿐더러 개인만으로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이 늘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의 도덕적 완성이나 개인의 인격의 완성이라는 것은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지 기독교에서는 안 가르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 나라의 도리가 가르치는 것은 개인의 완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의 완성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나라는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신령한 몸의 완성에 따라서 같이 완성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자신 하나하나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 최후에 가서 완성됨으로써 비로소 내가 도달해야 할 그 의롭고 선하고 아름답고 참된 위치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덕은 개인 향상 위주의 개인주의적인 도덕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 사상을 우리가 깊이 생각할 때에 항상 개인을 중점으로 생각하는 사상은 비신국적(非神國的)인 사상입니다. 그렇게 배우든지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요컨대 하나님 나라의 큰 사상의 내용을 기저로 해서 성경을 소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것은 착해라, 의로워라, 혹은 참되라, 아름다워라 하는 뜻이다’ 하고 자기가 얼른 지레짐작하는 까닭에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전체의 기조 위에서만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이 크게 목표를 세워서 가르치는 그 터 위에서 그 다음의 자자하고 세세한 문제도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큰 문제를 떠나서 늘 부분만 우선적으로 잡고 해석할 때에 큰 오류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중략]

그러한 많은 것을 저 자신이나 여러분이 다 경험했는데 이 나라뿐 아니라 저 나라에 가서 사방에 다니면서 들을 때 항상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가? 기독교도 결국 개인의 구원과 개인의 인격적인 완성이 최고의 목표인가? 그러면 다른 종교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목표나 가지고 있는 구상이 어떻게 다른가?’ 하고 한번 질문하고 자꾸 의문을 캐 볼 때 성경은 “너 하나를 위해서 거룩한 도리가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김홍전,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