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할 것은 본질적이고 근원적으로 생각할 때, 세상에서는 어떠한 성자(聖者)라도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할 뿐 아니라 죄와 상관없이 죄를 안 짓는 생활을 한다고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고,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단 일초간이라도 죄라는 세계를 떠나서 사는 시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하면 단 일초간이라도 죄를 안 짓는 시간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죄를 안 짓는다든지 짓는다든지 하고 말할 것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하는 말을 할 것이 없습니다. 단 일초간이라도 죄를 안 짓는 시간이 없고 늘 죄…속에서 사는 사람이니까 그렇습니다…나 이외에 바깥에 죄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엄격하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내 생활 전부가 죄라는 것입니다. 내 생활의 가장 의롭고 착하고 선한 시간도 죄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는 본질적으로 결핍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 하나님 앞에 부채(負債)를 자꾸 짊어지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이 마땅히 요구하시는 장성을 하느냐 하면 요구하시는 장성과 당위를 나는 다 채우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 그만큼 부채를 지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만큼 부채를 지고 내일 이만큼 부채를 지고 모레 이만큼 부채를 지면 그것이 누적될 때 오늘날 나의 서 있는 자리는 무한히 많은 부채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신 장성이나 이해나 깨달음은 이런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까마득하게 이르지 못해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지금 나는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지도 모르는 처지라는 말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라는 사실이 우리의 이 기본적이고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결핍을 메워 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히 산다, 거룩하다, 신령하다 하는 사실은 내 오늘날의 현실을 전제로 하고 현실에서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이만한 그릇이라 할 때 이 그릇은 당연히 이만해야 할 그릇은 아닙니다. 그것은 굉장히 작은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요구하신 그릇에 비교할 수 없이 작다는 말입니다. 성신님이 나에게 충만히 역사하시더라도 이 그릇에 부어서 충만하신 것입니다. 이 그릇 이상은 커지지 않습니다. 성신이 이 그릇 이상으로 신통하고 이상하게 나타나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현실하에 있는 나는 죄를 안 짓는다든지 짓는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할 대상이 안 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 김홍전,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삶> 中
Tag Archives: 신령한 생활
복음과 죄, 옛 사람과 새 사람, 그리고 신령한 생활
옛 사람과 새 사람
복음이라는 것에 대한 설명 가운데서 죄를 속하시는 예수님의 속죄의 공효라는 것이 어떻게 효과를 나에게 미쳤느냐 할 때, 죄의 형벌에서만 나를 건지시는 것이 아니라–엄격히 말하면 죄의 형벌이라는 것은 범죄한 사람이 계속적으로 범죄를 하고 범죄하는 상태에 그냥 방치되어 있는 것도 하나의 형벌이라고 그랬어요. 그러기 까닭에–형벌을 철저하게 완전히 면제해 주셨다면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책(罪責) 때문에 계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을 뿐 아니라 무서운 흑암 속에서 헤매는 것을 완전히 건져 주신다는 확실한 사실이 있는 까닭에, 현실적으로 죄의 권세가 나를 지배해서 어둠과 고통과 또 하나님을 반역하는 길로 질질 끌고 나가는 죄의 세력의 악한 작용의 모든 관계에서 나를 건져 주신다는 사실이 거기 있다 그것이오.
이렇게 죄의 힘에서 건져 주심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거기 기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건 죄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느냐 할 때에는 물론 사람의 속에 있는 죄의 근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죄의 근성이라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죄라고 보는 것이, 그 사람 속에서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떠한 선이나 충성이나 의를 좇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그것은 행치 못하게 하고 원치 않는 저것은 행하게 한다는 무서운 맹위를, 폭위를 발휘한다는 것을 우리가 또한 배웠어요. 이것이 로마서 7장에서 주로 논한 말씀이올시다. 이렇게 해서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지랴’ 하고 바울 선생은 자기가 관찰컨대 `거기에 하나의 법칙이 있다. 그건 죄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하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그로 인하여서 자기 속에 죄를 짓고자 하는 요구가 있고, 또 과거에 죄를 지어 버릇해서 거기에 아주 적응하게 되어 있는 자기의 습성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건 또한 기본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도덕적인 성격 가운데 딱 자리를 잡고서 늘 맹위를 떨치는 것인데, 이런 부패한 인간의 성품, 이걸 가리켜서 옛 사람이라는 말로 로마서 6장 6절에는 표현했어요. 사람–사람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이냐 하면 옛 사람이다 했어요. 그리고 이 옛 사람이라는 것은 항상 우리에게 있어서는 경계를 해야 할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친 것이올시다.
거기에 또한 대조해서 성경에는 새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 같으면 옛사람 · 새사람 하고 둘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옛사람 · 새사람이라는 두 가지의 현저한 다른 실체가 움직인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올시다. 오늘 읽은 이 말씀 가운데도 보면 에베소서 4장 22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여기도 옛 사람이라는 말이 있어요–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기도 옛사람 · 새사람이라는 말이 확실히 대조되어 있습니다…
옛날의 나쁜 습관을 옛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님
…그 옛사람이라는 것이,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런 것 보면, 옛날에 믿지 아니했을 때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금 늘 당연지사라고 좇아가고 있는 여러 생활 습관이나 여러 사상이나 감정이나 등등이 필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한 인간적인 품성을 발휘케 하는데, 그런 품성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습관이나 사상이나 감정 등을 그대로 자기도 베껴서(copy) 자연스럽게 그대로 발휘하면, 그것은 특별히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없이 자연히 사회의 물결 속에서는 그 물을 먹고 그 물을 토하고 사는 까닭에 그대로 들어보면 그것은 옛사람이 나오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오.
옛사람 가운데 있어서는 위대한 사람도 있어요. 또 도덕적으로 훨씬 선한 사람도 있어요. 세상의 안 믿는 사람도 의를 위해서 자기가 일신을 내버리는 사람도 있고 생명을 바치는 사람도 있고 또 노심초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오. 의가 충천하고 진리를 좇는 사람, 또 거룩한 것을 늘 찾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올시다. 그런 사람들은 옛사람이 아니고 새사람이냐 하면 소용이 없는 이야기요. 다 옛사람이오.
그런 점으로 볼 때, 옛사람 · 새사람의 구별은 사람이 개과천선을 해서 허물과 죄를 버리고 선과 의를 좇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해요. 옛사람은 구습을 좇기는 좇아간다. 구습을 좇아 안가면 옛사람 아니다는 것은 아니오.
그렇기 까닭에 `옛사람과 새사람의 경계는 무엇으로 따지느냐?’ 하는 거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말씀을 주의하세요. 새사람은 새로 지으심을 받아야 새사람이지, 새로 창조함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새사람이 아니다 하는 거요…
예수님의 새 생명이 발휘되는 인격을 새사람이라고 함
…새 창조, 재창조에서 필연적으로 조성해 놓는 사람이라야 새사람이지, 재창조라는 사실이 없고 새사람만 지어지지도 아니하는 것이고, 새사람을 안지었는데 옛사람이 악에서 조금 악을 덜 하고 선을 좀더 많이 했다고 혹은 대단히 상당히 대전환을 해서 상당히 악하던 사람이 그 모든 악을 포기하고 상당히 전향을 해서 선을 행하고 의를 향해 간다고 그것을 보고 새사람이라고 하지는 아니한다 그 말씀이오. 그러기 까닭에 성경에서 옛사람 · 새사람 할 때는 그 경계선은 새로 지은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는 것이올시다.
그러면 우리가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 하는 사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함을 받은 사람, 그 사람이 곧 또한 새사람을 가지는 것이다 하는 것은 성경에서 가르친 것을 여러분 잘 아시지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새로 창조를 받은 것이다–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인데…
예수님의 새 생명을 받고 거듭났다고 해서 바로 새 사람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님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함을 받았으면 곧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냐 하면 새로 창조함을 받은 그것만으로 그는 자동적으로 언제든지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는 안된다 그 말이오. 여기 에베소의 이 편지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올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버려라 하는 명령이오–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골로새서는 “입었으니” 하는 과거사를 썼지만, 에베소서는 “해라” 하고 명령하신 것이오. 그러면 이것은 예수 믿을 때 자동적으로 사람이 스스로 만들지 아니한, 하나님께서 오직 그 대권과 능력으로서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데서 이루신 그 재창조 곧, 중생(重生, 거듭남)이라는 사실, 그것 자체가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입어야 한다 하는 것이올시다…
…중생의 사실은 영원한 생명의 사실인 까닭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터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저를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해서 영생의 확보라는 것이 분명히 있지마는, 새사람의 사실이라는 것은 때를 따라서 옛사람을 다시 입고 나오고 새사람을 지지 눌러 버려서, 예수를 믿고 중생한 기록이 있다 하나 참된 생명이 속에 있는 것 같은 확실한 표현이 없이, 구습을 좇는 이 세상 사람과 같은 식의 생각을 하고 같은 감정을 품고 같이 나가고 다만 기독 종교 하나만이 자기에게 의식적으로 항상 지배하고 있다는 정도의 생활을 하는 것이 참 많은 것이올시다.
새 사람의 몇 가지 자태
새사람이 어떤 모습이냐라는 것은 결국은 그 새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상적인 것, 그 목적이라는 것, 그걸 먼저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새사람이 갖고 있는 목적은 무엇인고 하니, 작게는 무엇보다도 자기 부인(否認)에 있는 것이오. 소극적으로 첫째는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데 새사람이 있는 것이오. 자기를 시인하는 새사람이란 세상에 존재 않는 것이오. 자기를 시인하고 있는 동안 새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인 줄 알아야 하는 것이오.
언제든지 자기를 시인하고, 자기의 행복이라는 것과 일단 유사할 것 같으면 자기의 행복이 먼저 앞선다는 이런 정신; 이건 속에 `자기’라는 게 딱 서있는 까닭에 그런거요. 평소에 아무리 유순하고 좋고 맘이 좋고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과 같이 뵐지라도–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선의 하나인 까닭에 그걸 나쁘다고 말할 수 없어요. 사회 생활하는데 사람이 품성이 좋고 조화 있고 하는 것이 좋긴 좋습니다만–그것을 그리스도교에서 덕이다고 따지지 않는다 그 말이오. 그럴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덕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있는가?’ (자기라고 하는 생각이 없는가) 즉, 문제가 있을 때 자기 행복이 먼저 앞서는가 아니면 주님의 나라의 일이라는 게 제일 먼저 자연스럽게 앞서는 정신이 딱 생기는가, 그것이 첫째 중요한 문제인 것이오…
…옛사람이라든지 새사람이라든지 하는 것이 공허한 이야기가 아니고, 참으로 생활 가운데서 그가 완전히 자기를 부인한 생활을 하는 데서만, 철저히 자기를 포기해 버리고 주께 전부를 바치고 나가겠다는 이 생각을 하는 데서만 비로소 깨달아질 수 있는 문제올시다. 그렇지 아니하고 덮어놓고 기분 좋게 새사람 노릇하려고 하면, 글쎄 기분 좋을른지는 모르지만 이게 새사람이라는 사실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이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새사람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는 것이 뭐냐, 요소라는 게 뭐냐 하면 첫째, 새사람은 새사람인 까닭에 자기를 의식하는 옛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말이오. 그와는 반대라 말이오. 옛사람은 뭐냐 하면 궁극적으로 자기(自己)라는 것을 의식하고 자기 ego라는 것을 앞세우는 것이오. 항상 아상(我相)이라 하는 말로 썼는데, 아상이라든지 아만(我慢)이라는 것이 딱 서는 것이오. 그래서 의외에도 자기라는 것을 늘 의식하고 자기의 명예를 늘 생각하고 자기 일에 대해 누가 조금이라도 명예를 훼손하는 것인가 할 때는 곧 자기 자신이 거기에 반격을 하려고 하고 그 일에 대해서 곧 반응을 일으키고, 이 자기라는 것이 아주 강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이게 옛사람이라는 것이올시다. 새사람이라는 것은 뭐 맹충이 같이 누가 욕을 하더라도 아무 말도 않고 아무 반응이 없느냐? 그건 아니오. 문제는 항상 강렬한 새로운 반응 하나가 움직이는 것이오.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것이 무엇 되느냐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이오. 누가 나를 욕하면 `나 욕한 것이, 내 명예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 보통 흔히 있는 일이올시다. 아주 명예심이 강한 사람에게, 옛사람이 강하게 있는 사람에게 특별히 있는 것이오. 그러나 자기가 욕을 먹었을 때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께는 무엇이 돌아가는가?’ 먼저 예수님께 죄송한 생각이 나던가 예수님 앞에 당황한 마음이 생기든지, 이것이 있는가 없는가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는 뭐가 되는가’. 이런 것들은 조그마한 예올시다마는, 이제 이 옛사람 · 새사람의 구별,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명백하게 알아가지고 `어떻게 된 것이 옛 사람인가? 어떻게 된 것이 새 사람인가?’ 분별해야겠습니다.
신령한 생활은 새사람으로 사는 것
오늘 우리가 이야기한 것은 사람이 어떤 악에서 벗어나서 선을 행하고 선을 지향하고 나가면 새사람이냐 하면 그런 건 새사람 아니다는 것이오. 또 사람이 가령, 비교적 자기 자신을 반성을 하고 교만하다가 겸손하게 되면 옛사람이 없어지고 새사람이 들어온 까닭에 그러냐 하면 그런 것 상관 없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도 교만하다가 겸손하게 되고, 또 유교의 도덕 가운데도 겸손이라는 것을 아주 큰 덕으로 가르치는 것이오. 이게 그래서 사람이 자기 명예에 대해서도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溫)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라’, 사람이 나를 몰라준다고 내가 그렇다고 해서 성내지 않는다면 그거야 군자다 그래서 아주 원덕으로서의 사람은 자기 의식을 너무 강하게 가진다는 것 좋은 것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 것 보면 이건 유교의 도덕이라는 것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다 생각하는 도덕이오. 새사람이라는 게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거요. 그러면 어디에 있느냐 할 때, 가령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상이 없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새사람이라는 것은 성신의 충만한 능력 가운데서 그리스도적인 품성으로 주를 사랑하는 심정이 마음 가운데 강하게 지배하는 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거요. 그런 생활을 드러내는 자기 기본 품성이 하나 있다 할 때 그건 새사람이니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령한 생활이라고 하고, 또한 신령한 자라 말할 때는 새사람이 그렇게 늘 지배하는 사람이란 말이오.
- 김홍전, “신령한 생활” 中
믿음으로 행함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하는 말을 해석하는 중인데, 그러면 믿음으로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를 지금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내가 어디를 간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어디를 가면 거기에 갈 이유와 어떤 목적이 있고 가서 무엇을 하겠다든지 무엇을 이루겠다든지 하는 특별한 동기나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와 목적이라는 지적(知的) 내용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나와야 하느냐 하면 믿음의 요소인 하나님께 대한 지식에 근거를 두고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 첫째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믿음으로 한다는 말이 다 성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의 요소인 지식은 그것이 믿음의 요소가 되기 전에는 그냥 지식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것이 성경을 통해서 나의 사색과 진실한 연구 과정 가운데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지식일 뿐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되려면 성신께서 그것을 믿음으로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
신앙의 요소로서의 지식을 토대로 하고 간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믿음으로 한다는 말이 충분히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의 지적(知的) 요소에 근거를 두고 나의 간단한 행동의 원칙을 세울 뿐 아니라 내가 어떤 간단한 행동을 할 때에 그 행동의 이유와 목적뿐 아니라 할 수 있는 능력이나 결과에까지, 즉 전체의 행동 모두가 지적 요소로써 구성된 그 신앙을 토대로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지적 요소를 근거로 해서 이유나 목적을 세울 뿐 아니라 신앙의 지적 요소가 아예 그 가는 일의 토대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적 요소의 터 위에 서 있는 신앙이 자연스럽게 나를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신앙의 지적 요소가 나의 간단한 행동의 지적인 근원이 되는 까닭에 내가 주를 믿고 산다는 이 일과 내가 어디로 간다는 일이 동일한 지적 근거 위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믿고 산다는 신앙의 내용이 어디로 간다 하더라도 그대로 나를 둘러싸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내가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는 데에 신앙의 지적 요소를 근거로 삼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려면 지적 요소 뿐 아니라 신앙의 여타 요소가 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여타 요소라고 할 때 지적 요소를 근거로 할 뿐 아니라 정의적(情意的)인 요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의적 요소 가운데 가장 결정적으로 최후에 신앙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것은 정적(情的)인 요소가 아니라 의지적인 요소입니다.
[...]
정적인 요소란 뭐냐 하면 [...] 거기에 다 맡겨 버리고 짐을 딱 부린 심정입니다. `아, 과연 그렇다. 이제는 더 물을 것이 없다’ 하고 거기에 대해서 만족감과 안도감이 드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의 생명까지 다 맡기고 안심할 수 있다는 그런 심정인데 이런 정적인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최후에 가서 그 의지적 요소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제 이 일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 일은 꼭 해야만 하겠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중요한 단계로서 이 일은 내게 꼭 필요하다’ 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발을 디디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앙의 정의적 요소의 가장 중요한 면은 결국 어디로 귀착되느냐 하면 `나는 내 스스로는 이것을 할 수 없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으니까 맡긴다 하는 것인데, 그것은 앞에서 말한 그 정적인 요소, 맡긴다 하는 심정이 발휘되어서 진실로 모든 것을 딱 맡기는 생활 태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컨대 자기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처음부터 숙지하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이루실 것이다 하고 하나님께 전부 부탁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 부탁을 했으니 나는 안 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부탁을 했으니 이제는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곤두박질을 해도 도저히 안 될 것이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부탁했으니 하나님께서는 하실 것이다. 그런고로 나는 움직인다’ 하고 움직여 나가는 이것이 정의적인 요소의 중요한 면입니다.
이런 것들이 신앙의 여타의 요소들인데, 내가 어디를 간다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이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것이 가는 행동의 성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에 비로소 그렇게 가는 것을 가리켜 믿음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 김홍전,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삶> 中
말씀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성경이 참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면서 요구하신 바는 “네가 네 자신을 중심 삼아서 네 자신의 행복 증진과 네 자신의 향상이나 네 자신의 무엇을 늘 생각하는 그 세계에서 떠나서 나의 자식으로 거하는 세계로 들어와야겠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를 증가시키고 자기를 행복스럽게 하고 자기의 고통을 덜어야 하고 자기를 고귀하게 만들어야 하겠다는 그런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는 경계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묵상” (김홍전 著) 中
나[我]라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나라는 생각은 간 곳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만이 있는 사람이다. 아상(我相)은 자기가 없애겠다고 해서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효만이 나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의 아들로 해방시킨다. 성경을 읽고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자기를 고결하게 하고 자기를 아름답게 하겠다는 마음이라면 결국 자기를 섬긴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도 좋은 것이라 말하겠지마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자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바른 도리
사람이 성신님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새사람이 이루어졌으면 성신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만을 온전히 의지함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한 가지 뜻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적어도 세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율법이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벌받는다.” 하고 위협해 가면서 형벌을 이야기하는 것과, 그 다음에 “이렇게 해야 너는 살 것이다”라고 지시하는 것이 또한 거기에 포함됩니다.
하지만 사실상 사람이 아무리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더라도 자기 속에 죄와 사망의 법이 있어서 자기를 잡아 가지고 원치 않는 데로 끌고 갑니다. 결국 사람이 율법을 준수하려고 자기가 각고면려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율법의 명하는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바른 도리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안 이루어도 좋으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가르친 바른 정신들을 죽 설명하셨지만 또한 그 정신으로 실천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할 때,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3절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하면서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생명의 성신의 법으로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새로운 법칙이 있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성신께 맡기고 의지하고 그리고 네가 그 문제에 대해서 깨달은 대로 자기를 의의 병기로 드려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의 죽은 몸을 살리시고, 너희를 향해서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주실 것이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오셨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통해 율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한 사람이 한 가지 겨우 지켜 보려고 애를 써 형식만을 지키고 내용은 못 지키고 하는 그런 귀 떨어진 것, 그런 불적인 준수라는 것은 결코 율법의 요구를 제대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신령한 ‘새로운 술’, 혹은 ‘새 옷감’으로 표시한 예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던 사람들이 갑지기 “의를 행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는 일만은 내가 한 번 각고면려해서 이루어 보겠다”고 하면 그것이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계율주의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듣고 나면 많은 경우 “참 좋은 말씀이고 귀한 말씀이고 옳은 말씀이다. 이제는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실천 생활을 해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실천 생활을 하겠느냐 할 때 자기에게 있는 선(善)의 의욕을 자기가 잘 진작해서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수가 많습니다. 자기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생명의 성신의 법이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한 그 은혜를 실지로 맛보고 살겠다” 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새로운 도리인데, 이 새로운 도리를 계율주의의 구태에 집어 넣어서 그것을 혼동하고 혼합해서 하나의 이론을 세운다면 그것은 아무런 지침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의지하고 살라는 말인가 아니면 성신의 능력을 의지하고 살라는 말인가?’ 여기에 대하여 이것도 의지하라고 하고 저것도 의지하라고 하면, 그런 이론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오.
이런 일들은 하나님 앞에 진실히 살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해 보아야겠다” 하면서 흔히 겪는 일입니다. 처음에 성신을 의지해서 승리의 생활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가는 거룩한 생활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모를 때는 대체로 자기가 절제하고 누르고 애를 써서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신의 열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성신의 열매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그 하나씩 하나씩을 공부하고 노력해서 이루어야겠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국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통해 “이 새 술과 같이 굉장한 힘으로 팽창해 가는 신령하고 신선한 능력의 발휘가 구태의연한 형식에 꽉 잠겨 가지고 과거의 형식을 통해서라도 그대로 나타날 것 같으냐?”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사상과 그 내용, 신령한 생활의 지침, 그로 인한 생활들을 어떻게 구식의 계율주의의 여러 전통적인 행습을 통해 자꾸 나타내려고 한다는 말이냐? 옛날의 형식으로 눌러 놓고 그것으로 조절해 가면서 나아가려고 하느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사상과 제도와 또 새로운 생활이라는 것은 역시 새것에 합당한 옷을 입든지, 새것에 합당한 그릇을 쓰든지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교회의 자태는 새로운 여러 지침과 제도 하에서 거룩한 교회답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김홍전, “신령한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