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가하면 성경 시대의 방언은 계시적 도구였지만 오늘날의 방언은 계시적 도구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오늘 날에도 방언 현상이 있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둘째 입장을 가지게 되면 성경에 나타난 방언과 오늘날 있는 방언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이런 입장을 취할 때, 오늘날의 방언 현상과 성경적 방언을 같은 것으로 보고 하는 논의를 하거나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 “방언 문제에 대한 성경적 개혁 신학적 논의를 감사드리면서” 이승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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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믿음을 주지 못함
기적으로 사람을 믿게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지상에서 활동하셨을 때 이스라엘 민중은 다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증거한다 해도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부자가]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16장 29-31절)
물론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라 함은 “토라와 느비임” 곧 성경을 의미합니다.
Todd Bently (토드 벤틀리)
베니 힌(Benny Hinn)에 대해서는 그의 책을 놓고 서평을 쓴 것이 있고, 샨 볼츠(Shawn Bolz)와 관련해서 신비주의를 경계하는 글을 쓴 적이 있지요. 그 때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 중에 Todd Bently(토드 벤틀리 혹은 타드 벤틀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의 사기성에 대해 Nightline에서 방송을 했네요. 동영상을 아래에 옮겨 왔습니다.
기름 부음! 영성! 치유! 신유! 방언! — 이런 말들을 외치면 굉장히 신령해 보이지만, 신령한 능력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굵직한 선을 그은 신앙의 선조들을 보면 전혀 그런 것을 외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확인하는 바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5)
벤틀리는 마치 기적이 구원의 신앙의 증거인 것 처럼 얘기합니다:
“기적과 치유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며, 표적이 없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신학 뿐입니다” — 벤틀리 (Travis Reed, “Religion Today“, Associated Press. 2008년 7월 30일자)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믿음이 있다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태복음 7:22,23)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과 병 고치는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방언으로 무엇을 깨달으려 하는가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고린도전서 4:6)
설령 방언을 하고 해석하는 가운데 무엇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인가는 결국 성경을 통해 분별 됩니다.
그렇다면, 방언을 하지 못해도 성신께서 성경을 통해 같은 내용을 깨닫게 하신다면 목적이 달성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던 안 하던 차이는 내 감각적 차이만 있을 뿐이지, 결국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는 방도는 말씀을 통해서이고 방언이 성신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더 나은 방법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 만 번 꿈을 꾸고 방언을 해서 무엇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록된 말씀에서 벗어난다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우리의 신앙 생활을 위해 필요 충분한 내용을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경을 통해 제시하셨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치 방언을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 보다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하고 있다는 생각 또는 주장들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방언, 꿈 등을 통해 무엇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깨닫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개인의 사생활을 맞추는 점쟁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주위에 용한 점쟁이가 있다던지, 자기의 어떤 진로를 맞췄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속에서 점쟁이가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적은 드물 뿐 더러, 만일 점쟁이가 국가 정책을 좌지우지 했을 때는 나라가 중흥하기는 커녕 망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줍니다.
개인의 사생활을 케내는 그런 조잡한 미신, 사술, 설령 그것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하더라도, 그런 점치는 행위는 근절되어야 하고 사라져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를 보는 안목, 정치적 안목, 경제적 안목 있는 유능한 사람들입니다.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식견과 안목을 갖는 것이 점치는 사술 보다 훨씬 중요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앞날을 내다 보고 예비한 사람들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이라는 증거는 그들이 앞날을 내다봤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통찰력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여 국가 경영의 길을 제시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요새 소위 신통력 있다던지 예언의 영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개인의 사생활과 욕심과 관련해서나 무슨 얘기들을 하지,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고 참으로 실력있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데는 별 능력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참 된 능력은 없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