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빈곤

기독교의 진수는 죽어서 천당가는 데에 있지 않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내세에 국한 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성경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과연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해 보면 대답이 모호하다는 것이 우리의 빈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공동체다 등 여려 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얼마나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가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그 의식이 빈약하다면 그만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각성이 빈약하다는 뜻일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란 단어가 죽어서 가는 곳이란 한정된 의미로 대개 사용 되는 것이 아닐까요?)

성경의 기록을 보면 (특히 누가복은 24장과 이어지는 사도행전 1장)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까지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당신이 누구인가, 왜 부활하여야 하는가를 설명하시고,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현재 다스리고 계신다고 증거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그 나라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어떻게 그 왕권을 행사하시는가? 그 나라의 법과 도리는 무엇이며, 무엇을 천명하고 또 추구하고 나가는가?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이는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신(神)개념의 진화?

성경을 비판하는 부류 중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대조시키면서 신(神)개념이 무자비하고 엄한 히브리 민족신의 모습에서 사랑이 많고 포용력 있는 전인류를 위한 신 모습으로 발전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 몇 가지만 되돌아보려고 한다.

(1) 아브라함의 기록

자주 등장하는 예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한 기록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인신제사를 요구하신 것일까? 아직 여러모로 인류 문화가 현대에 비해서 미개하였던 그 당시의 아브라함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했음직 하다. 그 때엔 다른 종교들 가운데 인신제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도 그런 제사를 원하신다고 생각한 것이다—바로 이러한 오해를 고쳐주시기 위한 것이 하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죽이려 하자 이삭에게 손 대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기 때문이다—이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제서야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셨다고 말하나, 그들이 간과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손 대지 말라고 하신 때도 역시 이삭을 죽이기 전이라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 것을 실제로 칼을 대기 전에 아신 하나님이시라면 애초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실 그 때에도 아셨을 하나님이시다. 고로,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 편에서 어떤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 편에 변화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결론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은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인신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가 분명하고도 여러번 선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깊은 의미를 담지 않으셨던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아브라함을 가르치셔야 했던 것일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1에서 말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치시라고 할 때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산제사”를 원하신다는 것을 직접 설명하시면 안 되는 것일까? 안 될 것이야 없겠지마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아브라함은 수 천년 전의 사람이며 계시의 초기 시대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제 완성된 계시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사도 바울의 글을 읽어도 다 이해가 안 되거늘, 아브라함에게 그런 예지와 통찰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 처럼 일종의 “체험 학습”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스라엘의 아말렉 숙청

사무엘상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이 아말렉 족속을 숙청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당시 모세를 통해 이미 받았던 명령이다. 아말렉의 치라는 이유는 그들이 그 지역의 매우 비열한 대강도단이었기 때문이었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는 설령 아멜렉이 그렇게 흉악한 범죄를 그 지역에서 오래 동안 저질러 왔다 하여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숙청하시는 것은 잔인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자연재해라든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원인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거두시는 일이 일어날 경우 그것은 잔인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 주위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통재(統裁) 아래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사 45:7) 역사 속에서 매우 드문 일이기는 하나 어떤 족속이 명맥을 잃고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일들이 있다—예컨대 마야인들이 그렇다; 지금도 마야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이유를 모르는데, 그들의 문명 속에서 발견하는 잔혹함을 볼 때 그들이 땅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잔인하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아멜렉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잔인하다고 느끼는 것은 생각에 오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그 내용을 다 모를 뿐, 또 모양새 만 다를 뿐, 하나님의 그 절대적 통치 대권의 발휘는 예나 지금이나 일관 되게 발현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현대에도 만일 한 사람 또는 단체가 나타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민족을 숙청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비판한다. 그러나 위에서 잠시 언급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는 기록된 계시가 (성경이) 완성됨으로써 종결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할 때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어디서 환상을 보았다든지 하는 사람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주장이 있다면 반박하기가 쉬울 것이다. 왜냐면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은 그들이 처했던 그 역사 시기, 역사적 사명 아래서 주어진 특수한 명령들이었기 때문이다. 특수한 경우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위에서는, 성경에 나타나는 신개념이 진화된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언급되는 대표적인 것들 두 가지만 살펴보았다. 이러한 내용들을 갖고 계속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그러한 긴 논술을 할 자리가 아니므로 간략한 소개로 마치려고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은 일관적이라는 사실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신관(神觀)에서 연유된 오해라고 본다.

(참조문헌: 김홍전, “사무엘시대1“)


명실이 상부한 신앙

(사사기 소고 1, 제 3-5강 을 읽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체득, 체현 하여야 하겠다”

유명무실한 신앙을 반성함

우리는 “은혜 받았다”는 말을 자주 쓰는데, 그 진정한 의미를 살려서 쓰고 있는가? 예를 들어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우로지택(雨露之澤)도 은혜다. 그러나 은혜 중엔 하나님의 백성들만 특별히 누리는 은혜, 구속의 은혜가 있다. 성경을 읽을 때도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성경을 읽으면 받을 수 있는 감동과 지식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일반 은혜이다. 이러한 말씀의 영향을 가지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은 아니다. 성경을 성신께서 들어 쓰시사 사람이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활동하게 하시고 장성케 하시는 역사가 있을 때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용한 것이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에게 성경을 주실 때 의도하신 특별한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았다”는 말을 할 때, 성경을 읽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든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지칭함인가, 아니면 죄의 권세에서 자유케하시고 그리스도를 향해 걷게 하시는 구속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얘기인가? 말로는 “은혜”를 외치기 쉽지만,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은혜의 실증을 갖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것들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분별하지 못한 채 자연인이 쉽게 가질 수 있는 종교관과 뒤섞인 자태를 취하고 있다면 그것은 혼잡 가운데 있는 것이며, 거룩하지 못한 것이며, 교회를 더럽히는 것이 된다. 여기서 타락이 시작된다는 것을 사사기는 보여주고 있다. 성경의 언어들로 꾸며진 기독교 문화가 융성할지 몰라도 그것은 참 종교, 참 신앙의 실증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이 세상’(ο κοσμοσ ολοσ)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 종교 또한 포함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닌 능력

하나님 나라를 가장 뚜렷이 세상에 증시하는 기관인 교회는 그 처한 역사 시기에 따라 세상의 공격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해 기독교를 변증(apologetics)하는 움직임이 있어 왔는데, 이것이 승리를 거두는 것을 보는 것은 드물다. 물론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은 오직 성신님의 역사로만 깨닫게 되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해는 된다 (고전 2:14). 그렇다면 교회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한단 말인가?

“와서 보라” (요 1:39,46; 4:29)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하셨다 (고전 4:20). 사람의 허술한 철학과 무지를 타파하는 것은 실증에 있다. 결국 세상엔 구원의 능력이 없지만, 그리스도에겐 구원의 능이 있으며, 그리스도와 그 분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증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다. 교회가 거룩하게 구별되어 이 세상에서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는 것의 중요성이 여기 있다. 세상과 섞여서 하나님 나라의 광망을 드러낼 도리는 없다. 교회는 무엇이 신국적(神國的)인지 무엇이 비신국적인지 늘 분별해야 하겠다.

현 세대의 특징

20세기를 지나면서 나타난 교회에 대한 공격의 특이한 점은 그것이 ‘정통’이라는 이름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복음주의”라는 이름만 내걸어 놓고 열린 자세를 취한다면서 (이러한 것들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닌데), 무엇이 신국적(神國的)이고 비신국적인지 냉철한 분별 없이, 심지어는 반신국적인 것임에도 그것을 취하여 선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참 기독교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슷하나 아니다’라는, 다시 말해 사이비(似以非)인 것이다.

사이비적인 것을 배제하려면 참된 것을 확호하게 쥐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족할 때가 많다. 당장 “예배”라는 문제라도 놓고 봤을 때 무엇이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것인지 모호할 때가 있다. 찬송과 말씀, 기도 등을 합친 것이 예배인가?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요 4:23)고 했는데,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바 찬송, 말씀, 기도 등과 구별짓는 예배의 본질적 내용을 간취하지 못한채 ‘예배 갱신, 예배 회복’ 등 수 많은 구호를 외쳐 보아도 유명무실할 뿐이고 그만큼 교회는 가난해지는 것이다.

현 세대의 공격의 또 다른 면모는 매우 치밀하고 세세하게 공격해 온다는 것이다. 예컨데 인간의 이성을 최고의 자리에 모셔놓고 성경을 분석하겠다는 자유주의 신학이 그런 유이다. “동정녀 탄생은 신화”라는 주장을 세세한 이론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그런 것에 대해 “그것은 정통 기독교가 아니다”는 주장을 하는 소위 ‘보수적 교단’들이 어떻게 결국 자유주의를 수용하였는지 우리는 보았고, 또 보고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나라는 말과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통입네”라는 이름만 있을 뿐 그 실증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왜’ 그리스도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해야 했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의 이론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이다. 공격이 치밀하게 오는 만큼 우리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쳐 주신 것들에 대해 어리숙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깨닫겠다는 자세가 요구된다.

명실이 상부한 위치로

예배면 예배, 찬송이면 찬송, 기도면 기도 —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방도들로 주신 것들에 대해 주께서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바로 알고,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대하여야 할 것이며 또한 그것을 통해 주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한 체득이 있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대상 중 가장 고귀한 교회에 대해서도 그 본질과 생명을 분명하게 알고, 말로만 ‘그리스도의 몸’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실증이 있어야 하겠다. ‘예수는 왕’이라 외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분의 통치의 체현이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증시하는 위치에 있어야 하겠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있다는 것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마 12:28)고 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분명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선지자들을 통해 장차 오리라 예언된 이상국가이다. 이스라엘 민중은 또한 성경을 통해 장차 메시아(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가 올 것이고, 바로 그 메시아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국가를 이상국가로 인도해 갈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언되었던 그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이 역사적 사실을 다른 말로 하자면 `메시아 왕국이 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의미를 넘어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유사 이래 늘 있었던 것이다 — 즉, 하나님의 통치 대권과 그 통치를 구체적으로 받는 그분의 백성, 그리고 그 백성들이 밟고 있는 이 땅에는 늘 하나님의 나라가 서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처음에는 가족이라는 단위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부족으로 확장되었고, 점점 더 커져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국가적 형태를 취하여 구체적으로 이 땅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복하지 않았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암매한 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그 가운데서 주의 선지자들은 장차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 예언하였다.

놀라운 것은 그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 은혜의 왕국이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장차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높이사 하나님 우편에 앉히셔서 만물 위의 주(主)로 삼으셨고, 그곳에서 그리스도는 천하 만물을 통치하고 계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 높일 때는 이 사실을 분명히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의 평안은 빼앗길 수 없는 평안이다: 그들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권능으로 천하만물을 다스리시며 역사를 진행시키시는 것을 보기에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이 우리에게 가득한 것이다.

그리스도관과 하나님 나라의 증거

김홍전 목사님의 <내 증인이 되리라> 1권 제 4강 “제자들의 메시아관”을 읽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어떻게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부활하여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 설명하신뒤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여쭙게 된다. 비록 역사 가운데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이 위대한 사건을 그들은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완성된 모습으로 펼쳐지리라 오해하였던 것이다.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은 완성된 모습이 아닌 시기를 거쳐야 함을 그들은 깨달아야 했다. 물론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잘못된 생각을 하기가 쉬운데 이러한 것들이 제 4강에 몇 가지 나열되었다.

제2위 하나님 — 요한복음 1장에서는 그분을 하나님의 로고스(λογοσ)라 표현하였는데 — 로고스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예수님께서 겉은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내면은 완벽한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쉬운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을 다 가지지고 동시에 또한 사람으로서의 본질을 다 취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도 우리의 한계를 다 경험하셨지만 (배고픔과 피로 등등) 또한 그 영혼의 활동에 있어서의 제한도 경험하셨다 — 그래서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와 같은 식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로고스의 인격이고 그렇게 나타난 예수님의 인격은 거룩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로고스의 인격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성경은 또한 표현하였다.

이러한 것을 바로 생각하지 않으면 성삼위 하나님께서 세 인격이시지만 곧 한 분이시라는 거룩한 속성과 다르게 어떤 한 위가 다른 위 보다 낮은 서열에 있는 것 같은 이론을 펼치기가 쉽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받으사 지금 이 땅위에서 통치대권을 발휘하신다는 사실 역시 이상과 같은 사실 위에서 이해가 가는 것이다. 로고스로서 제 2위 하나님께서는 왕권을 누구에게 받을 것이 없이 하나님으로서 늘 갖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 로고스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뒤 부활하셨는데,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부여된 영광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왕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왕권을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왕권은 재림 후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데, 그 통치의 사실이 더 분명히 드러나기는 그분의 피로 사신바 된 백성들 곧 교회를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것은 언어적인 증거도 있겠지만 이렇게 존재 자체가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집안의 자식들이 밖에 나가 행동할 때 그들의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므로 다른 집안 아이들과 구별된 특성을 보임으로써 그들이 어떤 다스림 아래 있음을 보이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의 분명한 사실을 특별히 이 세상에 증거하는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성도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통치가 자기를 다스리는 것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본이요,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전체로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나가는 자태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